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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고졸 여성 노동자를 조롱하지 않았다― 설난영 발언 논란에 대한 맥락과 진실

마라수 2025. 6. 1. 13:19

 
최근 유시민 작가의 설난영 관련 발언을 두고 거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고졸 여성 노동자를 조롱했다", "여성 비하다"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가 던진 말의 본뜻과 맥락을 무시한 채, 단어 몇 개만 떼어내 공격하는 건 아닌가?

과잉 '정치적 올바름'(PC주의)은 본질을 흐린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름으로 표현과 관찰, 성찰을 단죄의 수단으로 바꾸는 풍경을 자주 목격한다. 문제는 그것이 과잉일 때다. 맥락 없는 단어 사냥, 정치적 의도에 따른 도덕 프레임 씌우기, 이 모든 것이 오히려 진짜 차별과 혐오를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이가 여성 정치인을 향해 “예뻐서 정치하느냐”는 식의 외모 평가를 한다면, 그건 명백한 여성 비하다. 문제 삼아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한 개인이 과거의 노동자 정체성을 부정하며 “노조는 못생기고 과격하다, 나는 문학적이고 예쁘다”는 식의 말을 했고, 그 변화된 태도에 대해 "왜 저렇게 달라졌을까"라는 취지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면,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처럼 비판과 조롱, 분석과 혐오, 관찰과 비하를 구분하지 않고 단어만 딱 떼어내서 프레임 씌우는 방식은 오히려 진짜 싸워야 할 차별을 흐리게 만들고, 정치적 편 가르기의 도구로 쓰일 뿐이다.

노무현과 설난영, 같지 않다

일부는 "노무현 대통령도 고졸이었다, 그럼 노무현도 조롱이냐"는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맥락이 다르다. 노무현은 자신의 고졸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고졸 출신 인권변호사'라며 차별을 뛰어넘는 상징으로 삼았다.
 
반면, 설난영은 스스로 노조를 못생기고 과격한 집단으로 규정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과거의 집단을 조롱하며, 예쁘고 문학적인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계급 의식'을 드러냈다.
 
노무현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말했고, 설난영은 '노조는 못생겼다'고 말했다. 이 둘을 같은 선상에 두는 건, 역사와 사람에 대한 모독이다.

유시민과 김문수 부부의 깊은 인연

유시민 작가와 김문수 후보, 그리고 그의 배우자 설난영 씨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함께한 오랜 동지였다. 특히 김문수 후보가 수감되었을 당시, 유시민 작가는 설난영 씨와 함께 그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법정 진술을 메모하고 녹취록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헌신적인 활동을 펼쳤고, 설난영 씨와 함께 농성장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이러한 깊은 인연은 단순한 정치적 관계를 넘어선 것이었고, 유시민 작가는 김문수 후보를 '좋아하던 형'으로 표현하며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랐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문수 후보가 보수 정치인으로 전향한 이후, 유시민 작가는 그와의 사적 인연을 끊게 되었고, 이는 설난영 씨와의 통화에서 느낀 거리감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깊은 관계를 고려하면, 유시민 작가의 최근 발언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오랜 동지였던 이들의 변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실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발언은 특정 집단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과거의 신념을 부정하고 변절한 이들에 대한 인간적인 탄식이었던 거다.

설난영 발언 전체에 대한 맥락과 해석

유시민 작가는 설난영 씨에 대한 일련의 발언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의 전환과 그로 인한 인식 변화, 그리고 정치적 태도의 변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느낀 심리적 구조와 정체성의 변천을 묘사한 것이다. 겉보기에 직설적이고 날카롭게 들리는 표현들도, 사실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동지를 향한 관찰자의 해석과 안타까운 감정의 표출일 뿐이다.
 
그는 우선 설난영 씨가 '찐 노동자', 즉 구로2공단 세진전자에서 현장 노동자로서 노동조합을 이끌던 사람이고, 김문수는 '학출 노동자', 대학 출신 운동가였다는 객관적 관계의 위계를 설명한다. 이때 '찐 노동자'라는 표현은 폄하가 아니라, 오히려 정통성과 진정성을 내포한 노동운동 용어로서의 강조다. 유시민은 오히려 설난영의 과거 정체성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 유시민은 이 부부관계의 구조가 '균형이 안 맞을 정도로 김문수가 설난영에게는 위대한 존재였고, 그런 남성과의 혼인과 정치적 동반자 관계가 그녀의 인식을 형성했다'는 심리적 서열 구조를 분석한다. 여기서 ‘고양되었다’는 표현은 유시민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설난영 씨가 스스로 그렇게 느꼈을 수 있다는 추정이다.
 
이는 정치사회학에서 흔히 말하는 ‘권력에 가까워졌을 때 생기는 자기 인식의 변화’에 대한 통찰이다. 그런 전환의 과정을 거치며 설난영 씨는 국회의원, 도지사, 그리고 대통령 후보의 배우자라는 공적 권력의 외곽에서 점점 핵심으로 이동해온 경험을 갖게 됐고, 그에 따라 남편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고 본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 가족이 겪는 대표적인 인식 구조이기도 하다. "설난영 씨의 인생에서는 거기 갈 수 없는 자리"라는 말은 신분 차별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과거에 품고 있던 세계관과 그 자리가 충돌한다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 말이다. 유시민은 그 괴리감 속에서 그녀가 '발이 공중에 떠 있다'고 표현했다. 이는 현실 인식과 자기 정체성 사이의 괴리감, 정치적 신념과 현재 위치 사이의 단절을 지적한 말이다. 즉, 정체성이 공중에 붕 떠 있다는 뜻이지, 그 사람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 뜻이죠”라는 말은, 그 모든 구조적 변화와 혼란, 그리고 자신이 알던 설난영이라는 사람의 급격한 언행 변화에 대한 충격과 당혹감의 표현이다. 이는 한국어 일상 회화에서 흔히 쓰는 “정신 차려라”와 유사한 표현으로, 실제 정신 상태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려는 말이 아니다. 유시민의 이 발언은, 과거 함께 싸우던 동지가 권력의 언어와 위치에 적응하며 과거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 느끼는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투영된 감정의 언어다.

이후 유기민은 "제 정신 아니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았고,
더 정확하고 점잖은 말로 표현했어야 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유시민의 이 발언은 여성 혐오도, 고졸 노동자 비하도 아니며, 한 사람의 삶과 정체성이 급변하며 일어나는 내면의 혼란과 충돌을 지켜본 이가 말하는 해석적 진단에 가깝다. 그리고 그 말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설난영 씨의 과거를 알고 있었던 유시민만이 할 수 있는 무거운 탄식이었다.

비판의 이중잣대도 돌아봐야 한다

놀라운 건, 유시민의 발언에 대해 여성 단체와 언론이 일제히 성명을 내며 공격에 나섰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말 그만큼 심각한 발언이었을까? 과거 김문수가 배현진을 성적으로 희화화했을 때 여성 단체들은 침묵했다. 김정재 의원이 "총알 한 발도 아깝다"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선택적 분노와 진영에 따른 윤리의 기준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닌, 정치적 이중잣대일 뿐이다.

유시민은 왜 공격받는가

지금 유시민은 현직 정치인도 아니다. 캠프에도 없고, 선거운동을 공식적으로 뛰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쏟아지는 공격은 폭격 수준이다. 마치 조국 장관 사태 때처럼, 그를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려는 언론의 기획이 의심될 정도다. 왜? 그가 이재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진보 진영의 중요한 상징 인물이고, 그를 무너뜨리려는 '정치적 타깃'이 된 것이다.

불안을 이해하되, 감정의 과잉은 경계해야 한다

물론 진보 유권자들이 느끼는 불안과 조심스러움도 이해는 된다. 지난 총선에서 유시민 작가가 언급한 '민주당 200석 가능' 발언이 보수층의 결집을 자극해 실제로 200석 달성에 실패했다는 해석이 있었고, 그에 따른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설난영에 대한 발언을 두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다”며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시민은 지금 정치인도 아니고, 선거 캠프에 몸담은 인물도 아니다. 그는 과거의 인연을 회상하며 한때 동지였던 사람의 변화된 태도를 지적한 것일 뿐이다. 그 사적인 회고의 한 대목에까지 맥락을 지우고 단어에만 집착해 도덕적 심판을 가하는 방식은, 나로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건 설득이 아니라 감정의 과잉이며, 공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표현 감시’처럼 느껴질 뿐이다.

조롱이 아닌 성찰이었다

유시민의 발언은 고졸 여성 노동자를 조롱한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의 자기부정을 비판한 것이다. 이를 조롱이라 규정한다면, 우리는 조롱과 성찰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의 발언의 본질은 성찰이며, 이를 맥락 없이 ‘여성 비하’나 ‘고졸 조롱’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핑계 삼은 정치공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결론 ― 듣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자

정치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다. 분노는 필요하지만, 진실 위에 세워져야 한다. 유시민의 발언에 대한 평가, 그 시작은 '제대로 듣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