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문재인은 진짜 아무것도 안 했나?

기울어진 기틀에 바로 서는 경제는 없다 (요약)
•주진형 대표, 한국 경제 2000년대 초반부터 장기 저성장 진입했다고 판단함
•10년마다 성장률 1%p 하락, 현재는 평균 2%대 성장
• 저출산·고령화, 산업 경쟁력 약화로 성장 동력 약화
•일본의 과거 경제 쇠퇴 과정과 유사하다고 지적함
• IMF 외환위기 이후 실질적인 구조 개혁 없었다고 평가함
•단기 구호 중심 정책, 5년 임기 내 성과 집착이 실패 원인으로 지목됨
• 일본식 모델을 비판 없이 이식했고, 새로운 시스템 설계 역량 부족이 근본 문제라고 함
• 투자 비중은 높으나 투자 효율성은 낮음
• 가계부채·부동산 투자로 소비 위축 발생
• 재벌 중심 경제구조로 인한 비효율성과 정치권 포획 지적됨
• 재벌 총수 사법 처리의 일관성 부족 문제 제기됨
• 교육·의료·연금 등 사회서비스의 민간 의존과 공공성 약화가 양극화 심화시킨다고 비판함
• 정치권, 책임감 있는 개입 부족하다고 지적됨
•국민들도 성장률·부동산 가격 집착으로 개혁 동력 상실
• 이로 인해 구조적 문제 해결이 지연되고 있다고 진단함
• 단기 성장률 상승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함
• 연 2~3%대 성장 지속 상황에서도 국민이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스템 설계 필요
• 주요 개혁 과제로는:
• 연공서열 임금체계 개편
• 노동시장 유연화
• 부동산 시장 안정화
• 사법개혁 및 법 집행 일관성 강화
• 교육·의료·연금 등 사회서비스 공공성 확대
•조세 체계 개혁
•개혁은 단기적으로 고통이 따를 수 있다고 인정함
•그러나 국민적 합의와 정치권의 결단 있는 리더십이 있다면
•장기적으로 경제 안정과 사회적 신뢰 회복 가능하다고 강조함
주진형의 진단은 정확했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 일본식
시스템의 유산, 재벌중심의 비효율, 그리고 제때 구조를 바꾸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버린 20년. 나도, 그의 우려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허전하고, 불편하고, 씁쓸해진다. 마치 진단은 차가운 지성으로 되었지만 그 안에 ‘정치’도, ‘민주주의’도, ‘저항’도 사라져 있는 느낌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진짜 아무것도 안 했나?
주진형은 말한다.
“노무현은 공부하다 끝났고, 문재인은 최저임금만 올리고 사라졌다.”
“이명박, 박근혜와 다르지 않다.”
“우린 일본 시스템을 베껴서 무너졌다.”
진짜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노무현은 비전2030을 설계했고, 종부세, 지방분권, 공공의료, 검찰개혁, 언론개혁을 시도했다. 실패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이 집단적으로 저지한 것이었다.
문재인은 포용국가를 외쳤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했고, 아동수당과 기초연금을 강화했다. 그리고 그는 기득권 구조를 바꾸려는 개혁의지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개혁은 번번이 좌초했다. 왜냐하면, 그 개혁의 대상이 바로 검찰, 언론, 재벌, 그리고 정치권력이 뒤엉킨 기득권 카르텔이었기 때문이다.
부동산 정책이 ‘세금 폭탄’으로 왜곡됐고, 조국 가족은 ‘범죄자’ 프레임에 갇혔다. 그건 정책 철학의 실패가 아니라 기득권 카르텔의 총공세였다.
그 모든 개혁 시도 뒤에는 조중동의 왜곡, 검찰의 반란, 한나라당·국민의힘의 국정 발목잡기, 그리고 언론을 통한 프레임 조작이 있었다. 그걸 빼놓고 “아무것도 안 했다”고 말하면, 그건 역사적 평가가 아니라 지식인의 냉소다.
일본 시스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 경제대국이 됐다. 일본의 시스템을 ‘그대로 베꼈다’는 주장은 절반만 맞다.
맞다, 우린 일본식 수출주도·관치금융 모델을 급하게 도입했다. 그건 자립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한강의 기적과 산업화를 만들어낸 현실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거다.
“그 시스템이 유효하지 않게 됐을 때, 그걸 누가 바꾸려 했고, 누가 막았는가?”
노무현과 문재인은 바꾸려 했다. 그리고 언론과 수구보수는 정치를 실종시켰다. 그걸 빼놓고 “시스템을 몰랐다, 설계 능력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 역사 앞에서 책임을 바꿔치기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가장 이상적인 자본주의 국가는 어디인가? 역사상 어느 나라가,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부와 복지를 조화롭게 이루며, 문화적 품위까지 잃지 않은 채 살아남은 전례가 있는가?
스웨덴? 미국? 독일? 모두 전쟁, 혼란, 금융위기, 갈등, 좌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선 이유는, 완벽한 시스템이 있어서가 아니라 민주적 정치가 그 갈등을 수렴할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치를 가능케 한 건 언론이었다. 국민이 어디에 동의해야 하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려주는 길잡이. 즉, 갈등을 ‘분열’로 내모는 게 아니라 ‘대타협’으로 이끄는 공론장의 심장이었다.
흥망성쇠는 숙명이다. 그러나 타락은 선택이다.
국가도 생명체다. 한때 잘 나가던 미국도 지금은 빈부격차와 정치양극화로 흔들린다. 유럽은 고령화와 난민 문제로 전성기를 지키기 어렵다. 국가의 쇠락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쇠락 앞에서 어떤 리더를 세우느냐, 어떤 여론이 형성되느냐, 어떤 언론이 역할을 하느냐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결국 우리가 진짜 언론을 가졌더라면, 우린 지금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우리는 스웨덴이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했는가?
스웨덴도 한때 깊은 위기에 빠졌던 나라였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은 스웨덴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실업률은 치솟았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은 폭동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 극단주의가 부상하고, 사회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하지만 그 위기 앞에서 스웨덴은 ‘타협’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1938년, ‘살트셰바덴 협약’이라 불리는 역사적 대타협이 성사된다. 전국적인 노사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임금 억제, 복지 강화, 조세 확충, 고용 안정이라는 4대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노동자는 파업을 멈추고 자본은 분배를 받아들였다. 정당은 이익집단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미래를 조율하는 정치의 본래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언론은 선동 대신 설명을, 갈등 조장 대신 이해 촉진을 선택했다.
이 대타협은 단순한 정책 합의가 아니었다. 사회 각계가 함께 만든 신뢰의 사회계약이었고, 그 결과 스웨덴은 복지국가로, 문화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왜 한국은 스웨덴처럼 되지 못했는가?
답은 하나다. 우리는 진짜 언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대타협은 언론이 국민을 분열시키지 않고, 설명하고, 연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는 어땠는가?
종부세를 “세금 폭탄”이라 하고,
조국을 “범죄자”로 만들고,
이재명을 “포퓰리스트”라 왜곡하고,
윤석열을 “정의의 사도”로 만든 그 언론.
그 언론이 없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스웨덴이 부러워할 복지국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결론 – 문제를 꿰뚫었지만, 책임은 놓쳤다.
주진형은 우리가 넘어야 할 구조의 본질을 꿰뚫었지만, 그 구조를 바꾸려 했던 정치적 시도들과 좌절들, 그리고 그 시도를 가로막은 기득권 카르텔의 실체를 너무 쉽게 생략해버렸다.
그 결과,
그의 진단은 차갑지만 공허하고,
명료하지만 희망이 없고,
정확하지만 책임질 자를 흐리게 만든다.
나는 그게 불편했고,
그 빠진 조각이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다.
그 빠진 조각의 이름은 ‘정치’이고,
그걸 죽인 범인의 이름은 ‘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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