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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김학의 사건? 엡스타인 스캔들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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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와 솜방망이 처벌, 정의는 어디에?

제프리 엡스타인. 그는 단순한 성범죄자가 아니었다. 미국 상류층, 정치계, 재계, 심지어 학계까지 촘촘히 얽힌 권력 네트워크의 한복판에 있었던 억만장자였다. 수십 명의 미성년자에게 성범죄를 저질렀음에도 2008년 고작 13개월 형, 그것도 '출퇴근 수감'이라는 황당한 처벌을 받았다. 일반 수감자가 철창 안에서 하루 종일 감시받는 것과 달리, 엡스타인은 일주일 중 6일을 하루 12시간 외출하며 개인 사무실에서 일했고, 사실상 감옥 밖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연방검사 알렉산더 어코스타와 맺은 '비기소 합의' 덕분이었다. 피해자조차 모르게 이뤄진 이 거래는 가해자에게만 유리한 '스위트하트 딜'로 불렸고, 그 뒷배경에는 '엡스타인이 정보기관과 연계된 인물이라 손대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이 사건은 미국 법 집행 기관이 가진 취약성과, 권력 앞에서 흔들리는 사법 정의의 민낯을 드러낸 대표적 사례였다.

진실을 파헤친 지역 언론, 마이애미 헤럴드의 집념

이 묻혔던 진실을 10년 만에 끄집어낸 것은 뉴욕타임스도, CNN도 아닌 지역지 마이애미 헤럴드였다. 기자 줄리 K. 브라운은 피해자 80명을 추적하고, 실명 인터뷰를 끌어내며 이 시스템적 부패를 파헤쳤다. 기사의 제목은 바로 ‘정의의 왜곡’. 내부에서는 '이 기사로 마이애미 헤럴드가 문 닫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까지 있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녀는 경찰 보고서, 법원 기록, 피해자 가족 증언 등 수백 건에 이르는 자료를 모으며, 기자 개인의 사명감 하나로 권력에 맞섰다. 이 용기 있는 보도 덕분에 엡스타인은 2019년 연방 성범죄 혐의로 재체포되었고, 결국 구치소에서 의문사했다. 진실은 언론이 추적했지만, 정의는 여전히 미완이다. 그러나 이 보도는 미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탐사 저널리즘의 표본으로 기록되었다.

엡스타인의 죽음, 사법 시스템에 남은 오점

엡스타인은 자살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됐지만, 정황은 수상했다.

"죽음조차, 그를 덮기 위한 거대한 설계가 아니었을까."

 

자살 감시가 해제된 뒤, 교도관은 감시를 하지 않았고, CCTV는 고장 났고, 목뼈는 부러졌다. 독립 병리학자들은 살해 가능성을 제기했다. 심지어 엡스타인은 죽기 전 '고위층의 성향과 약물 사용'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발언까지 남겼다. 이 죽음은 ‘우연’이라 보기엔 너무 많은 공백이 있었고, 사법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사망 경위는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미국 교정 행정과 연방 수사 체계의 총체적 신뢰 붕괴로 이어졌다. 국민들은 “이 나라는 누구를 보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정의의 기준이 무너졌다는 불신을 품기 시작했다.

권력자들의 그림자와 엡스타인 파일의 실체

엡스타인은 트럼프, 클린턴, 앤드류 왕자, 빌 게이츠, 빈 살만 왕세자 등 세계 권력자들과 친분이 깊었다. 그의 전용기 '롤리타 익스프레스', 사교파티, 사적 섬 방문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엡스타인 파일'은 여전히 비공개다. 법무부는 파일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비공개 방침을 고수하며 의혹을 키우고 있다. 이는 권력층이 법 위에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하며, 엡스타인 스캔들이 단지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체제형 범죄'였다는 걸 보여준다. 이는 범죄의 구조 자체가 권력과 맞물려 있고, 시스템이 이를 묵인하거나 방조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트럼프는 대선 공약으로 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약속했으나, 정권을 잡자 입장을 번복했고, 법무장관 역시 “파일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논란을 덮었다. 대중은 실망했고, 그 침묵은 음모론과 불신을 키우는 먹잇감이 되었다.

한국판 엡스타인 사건들, 김학의와 장자연

엡스타인 사건을 들여다보면 기시감이 든다. 한국의 김학의 전 차관 사건, 장자연 리스트가 그렇다. 고위층 성범죄, 부실 수사, 재수사, 그리고 끝내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구조. '누가 그들을 비호했는가?'라는 질문은 미국과 한국 모두에서 반복된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침묵하면 진실은 묻힌다. 엡스타인 사건은 권력형 성범죄가 어떻게 은폐되고, 피해자들이 어떻게 2차 피해를 당하는지를 보여주는 세계적 사례다. 김학의 사건 역시 피해자가 존재했지만, 동영상은 증거 능력이 없다는 논리로 기소가 무산됐고, 장자연 사건은 '문건의 진위'만이 논쟁이 되면서 본질이 흐려졌다. 이들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권력을 향한 수사는 쉽게 멈추고, 피해자의 외침은 쉽게 무시된다는 것이다. 정의의 저울은 애초부터 기울어 있었던 셈이다.

결론: 법은 누구의 편인가

엡스타인 스캔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일은 미공개고, 진실은 묻혔으며, 사법 시스템은 신뢰를 잃었다. 트럼프는 파일 공개를 약속했지만, 다시 숨겼다. 피해자는 있었지만, 공범은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건을 '미국 이야기'로 소비할 수 없다. 한국에서도 권력형 성범죄는 반복되고 있고, 시스템은 여전히 무너져 있다. 지금 필요한 건 다시 묻는 것이다.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실을 추적하는 언론의 집념이 없었다면, 엡스타인도, 김학의도, 장자연도 역사의 어둠 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패'다. 시스템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침묵했고, 방조했다. 이 침묵이 반복되면, 정의는 사라진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정의는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수많은 고통과 용기, 그리고 끈질긴 질문 끝에 겨우 얻어내는 것이다.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엡스타인 스캔들은 미국 사법 체계가 얼마나 권력 앞에 무기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이 반복되는 패턴을 멈출 수 있는가?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권력과 돈이 법 위에 군림하는 사회에서 정의는 과연 실현될 수 있는가?

 

정의는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현되도록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 싸움은 언론의 집념, 시민의 기억, 피해자의 용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엡스타인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학의와 장자연의 진실도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고 말하는 순간, 사건은 현재형이 된다.

 

엡스타인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미국의 대형 방송사도, FBI도 아닌 마이애미의 지역 신문이었다. 줄리 K. 브라운이라는 이름 모를 기자의 집요한 취재와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세상을 흔든 것이다. 바로 이게 탐사보도의 힘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언론이 있다. 바로 뉴스타파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돈의 유혹에도 휘둘리지 않는 몇 안 되는 독립 탐사보도 매체. 김건희, 윤석열, 삼성, 검찰, 국정원까지 — 거대한 카르텔을 정면으로 겨누는 뉴스타파 같은 언론이 살아남아야, 대한민국의 진실이 끝내 침묵에 묻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응원해야 한다.
법 위의 권력에 맞서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 바로 탐사보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