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27
언론은 사실을 전달한다?
맞습니다. 언론은 사실을 전달합니다. 가끔은 오보를 내고 왜곡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보도'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보도가 '진실보도'는 아닙니다.
즉, 우리가 대화를 하거나 논쟁을 할 때, 자신의 말에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근거로 “이거 신문에 났어!” 라고 말하곤 하는데, 신문에 났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진실이 결코 아니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과 ‘진실’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념이 안 잡히면 ‘참다운 앎‘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진실의 개념을 잡기위해 인터넷을 서핑 하던 중 아주 잘 정리한 글이 있어 그대로 퍼 올립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
●사전적 의미
진실(眞-참 진, 實-열매(실제) 실)의 의미는 참(올바른) 실제(實際) 즉, '거짓이 없이 참되고 바름 실제'를 말합니다. 사실(事實)의 의미는 '실제(實際)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말합니다. 여기서 실제는 '사실의 경우나 사실의 형편'을 말합니다. 사실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실제가 나오고, 실제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사실이 나와서 무한루프에 빠지는 의미해석이 됩니다. 사전만으로는 그 구분을 잘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사전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네요.
●철학적 의미
'철학'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생각할게 많습니다. 철학의 어원을 따지자면, 고대 서양철학까지 들먹여야 하는데, 일단은 제외하고 위 두 단어에 대해서 철학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풀이한 것을 보겠습니다. 사실의 철학적 의미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볼 수 있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현상. 의심할 수 없는 현실적 존재성을 가지며 사유(思惟-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에 의하여 경험 내용으로 확립된다.' 입니다. 진실의 종교(불교)적 의미는 '참되고 변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진리를 방편으로 베푸는 교의(敎義-교육의 근본 취지)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입니다.
●사실과 진실
비슷한 단어로 살짝 바꿔보면 더욱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리(사물의 이치), 진리(참된 이치), 이제 좀 다르게 느껴지는군요. 이렇게 사실과 진실의 의미를 곱씹어본 이유는 둘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사람들은 둘을 같은 의미로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혼돈을 교묘히 상술에 이용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전략적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혼돈은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는데 에도 이것은 아주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고 넘어 갑시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게으른 거지가 구걸을 합니다. '저는 제 손에 이백 원 밖에 없습니다. 배가 고프니 적선 좀 해주세요.'라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실제 그 거지의 손엔 이백 원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먹은 게 없으니 배고픈 것도 맞습니다. 이 두 가지는 눈앞에 보이는 실제이고, 사실에 속합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서 느끼는 감정은 긍정적입니다. 그럼 진실을 볼까요. 그 거지 옆에 있는 가방엔 그동안 구걸해서 모은 돈이 십만 원 넘게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굶었지만, 정말 배고픔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굶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진실에서 느끼는 감정은 부정적입니다. 위의 예에서 진실이 항상 긍정이고, 사실이 항상 부정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두의 개념이 같은 감정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진실의 눈
어떤 일이 자신 앞에 벌어 졌을 때 우린 가장 먼저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감정을 유발시키고, 그 감정에 의해서 행동하게 됩니다. 이미 행동이 진행되었을 때는, 우리의 머릿속엔 진실을 판단할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행동은 '확증편향'과 '닻 내리기오류'를 발생시키고, 사실을 진실화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와 상황논리를 만들게 합니다. 이미 진실과 거리가 멀어진 상태로 배가 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사실 앞에서 진실을 볼 수 있게 노력해야 합니다. 감정을 잠시 자제하고, 진실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진실을 보았을 때, 비로소 감정을 유발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이성적인 판단이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기 위해 무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속에서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가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의 눈은 어떻게 가질 수 있고, 사실에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저나 여러분이나 숙제인 듯합니다.
출처- http://yunsunghan.tistory.com/409?srchid=BR1http%3A%2F%2Fyunsunghan.tistory.com%2F409
사실과 진실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사실은 어제나 사실과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만들어진다. 편집되고 만들어진다는 건 이미 사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가끔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싶어서 객관화된 사실에 집착하곤 한다. 사실이라는 것을 추적하는 과정에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관점의 차이를 극복한 객관화가 가능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내가 들고 있는 이 머그잔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둥근 원이지만, 옆에서 바라보면 직사각형이듯, 사실은 언제나 전체의 형상을 놓친다. 머그잔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입체적이고 다각적인 시선도 놓치는 것이 많다.
머그잔의 질감을 제대로 알려면 보는 것보다는 만져보아야 하며, 더 자세한 속성을 알려면 두드려도 보고 깨뜨려도 보아야 한다. 그 모든 감각들을 동원하면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 사실적이지 않게 되고, 그러므로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여기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이 진실보다 더 애매하다. 사실에는 진실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진실은 언제나 매복해 있다. 매복해 있기 때문에 불쑥불쑥 드러나며, 드러나지 않을 때도 많다. 사실처럼 입체적인 각도를 이뤄낼 수도 있다.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심안으로 보아야한다. 사실은 몇 가지 단서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진실은 단서를 들이댄다고 해서 추적할 수도 없다.
진실은 켜켜이 쌓인 것들을 풀어헤쳤을 때에 오히려 산만해진다. 진실은 언제나 덩어리째 존재해야만 형상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낱낱이 분석할수록 명징해지는 측면이 있지만, 진실은 분석하고 나면 형체가 흐트러지고 종합했을 때에 오히려 명징해지는 속성이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58fountainsite/LFgG/428?docid=1AwoS
|LFgG|428|20090706215309&q=%BB%E7%BD%C7%B0%FA%20%C1%F8%BD%C7&srchid=CCB1AwoS|LFgG|428|20090706215309
위 두개의 글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예를 들어 봅시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 죽을 쑤고 있는 재래시장에 도움을 주고자 이명박가카가 거금 10만원을 들고 이문동시장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동네구석구석까지 파고 든 대형마켓의 가격경쟁력과 편의시설에 밀려 전전긍긍하는 시장 통 사람들의 하소연도 들어주고 떡 볶기 집에 들려 지나가는 학생들까지 불러가며 오뎅을 사주고 자신도 졸라 맛있게 먹습니다.
또, 어느 가게주인이 하소연을 하자 "왜 장사가 안 되지.......?! 야! 이것 좀 사 먹어라" 하고 경호원에게 뻥튀기 구입을 강매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장번영회 사람들을 만나 애로사항을 듣고 자신의 지난 경험담(?)을 얘기하며 충고를 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문동시장은 대통령 방문으로 인해 모든 신문에 기사화되어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광고효과가 있었고 떡볶기집과 뻥튀기를 판 상점은 매출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서 느끼는 일부 국민들의 감정은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아도 손님 없는 시장 통에 가카 방문 전, 경찰, 경호실 인원이 보안 점검하는 라 들락거려 가카가 올려준 10만 원 이상으로 손님이 떨어졌고 번영회 사람들은 가카가 들려준 가카의 모진 고생담으로 인해 졸지에 세월 좋아 투정부리는 불평불만자로 전락했습니다.
말하자면 본질을 애써 외면한 '본말의 전도'입니다. 본질은 문어발식 대형자본의 야비한 돈벌이 행위죠. 이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에서 느끼는 감정은 부정적이며 가카의 이문동시장방문은 그야말로 서민을 우롱하는 예능이벤트이고 뻘짓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올바른 언론인의 자세
우리는 수많은 사실을 언론을 통해 보거나, 듣거나, 읽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유발되면서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동유발자인 언론의 역할이 지대함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언론은 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나머지 편파적인 언론행위를 서슴지 않고 합니다.
이를테면, 몰라도 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담은 8개의 기사와 반드시 알아야할 아주 중요한 사실을 왜곡한 2개의 기사를 함께 내보냅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는 우리는 착시현상에 빠지게 되면서 기사 전체를 긍정적으로 믿게 되는 거죠.
말하자면, 언론과 카르텔을 형성한 지배집단의 의도된 ‘기획된 흐름’을 만들어 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강제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반칙입니다.
민주주의 기본원리 중에 하나는 국민들의 통합된 경험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며 일반 국민의 의견 속에 지혜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랍니다. 동식물 세계에서 수많은 개체가 상호작용한 결과 진화해왔듯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상호작용하고 결합하여 결국 적합한 의사 결정을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모으는 효율적 방법이 바로 여론조사인데 이미 ‘기획된 흐름’으로 강제된 여론에 지혜가 있을 리가 없겠죠.
언론은 사회의 신경계통이나 혈관조직과 같습니다. 인체의 각 기관들이 신경줄이나 핏줄로 연결되지 않으면 제대로 존립하고 기능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사회의 각 기관들 역시 바른 언론이 전달하는 정보에 의해 쌍방향으로 상호소통하지 못하면 제대로 존립하고 기능하지 못하는 죽은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대의 언론인은 성직자와 비견할 만한 양심을 가져야 함을 물론이고 올바른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통찰력으로 진실을 쫓아야만 그들의 아들딸이고 조카인 중학생들에게 겨우 면목이 설 것입니다.
그 증거로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게재된 글을 소개합니다.
★신문과 진실
송건호(宋健鎬)
길가에서 택시 운전사들이 다투고 있다. 차가 서로 스쳐 차체가 우그러졌는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로 시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이 다 일리가 있어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신문에는 날마다 몇 건의 교통 사고가 보도되고, 우리는 의심 없이 그 기사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하찮게 보이는 교통 사고 보도에서조차, 엄격히 따져 보면, 진실 보도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순한 교통 사고조차 진실 보도가 어렵다면, 진실 보도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나 큰 문제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심지어 신문 기자 자신들조차 진실 보도를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으나, 문제를 좀더 파고들어가 생각해 보면, 진실 보도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진실’이란,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모든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多元的)이다. 진실을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일수록 그 존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일면만 보고서는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교통 사고의 경우도 시비하는 두 운전자의 말을 다 듣지 않고서는 공정하고 옳은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언론에 있어 ‘진실’이란, 첫째, 사물을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신문이 사건이나 문제의 전모(全貌)를 밝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과장하여 선전하기도 하고, 불리한 면은 은폐하여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정확한 보도는 일방적이며 편파적이다. 논평에 있어서도 진실한 논평을 하려면 이런 측면 저런 측면을 다 같이 검토하고, 그 바탕 위에서 공정한 판단과 결론을 내려야 한다.
공정한 논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거나, 이 문제는 이런 방향, 이런 각도로만 생각해야 한다고만 주장한다면, 이것이 곧 진실과 반대가 되는 곡필 (曲筆) 논평(論評)이 된다. 곡필을 하려면 그들은 사고(思考)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곡필은 어느 선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자유롭게 다각도로 사고를 하면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둘째, 언론에 있어 ‘진실한 보도와 논평’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역사적으로 관찰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물을 옳게 보도하거나 논평할 수 있으려면, 그 사물의 의미 또는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의 가치는 역사의 발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에 인정받았던 가치가 내일에는 부정되기도 하고, 오늘에 부정된 가치가 내일에는 새롭게 평가받기도 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평가하려면 항상 새로운 가치, 발전하는 새 날을 위한 가치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한다. 어떠한 가치에 서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사람의 안목은 결정된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란, 발전하는 새로운 가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치고 누가 발전하는 입장의 가치를 거부하겠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물을 보는 태도가 서로 달라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긍정적 가치인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부정적 가치가 된다. 이것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해관계와 연관된 처지에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같은 사물, 같은 문제인데도 보는 관점이 서로 달라 견해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사물을 볼 때에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퇴보의 가치가 아니라 발전하는 가치라는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셋째, 사물을 볼 때에는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덜 중요한지를 똑똑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는 다원적이라고 했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버스가 전복했을 때에 차체가 얼마나 파손됐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가장 중요한 면이 사건의 근거가 되고, 그렇지 않은 면이 사건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사물의 어떤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어떤 측면이 조건이 되는가를 예리하게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근거와 조건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진다. 보도 기사에는 ‘리드(lead)’라는 것이 있다. 그 보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리드’로 하여 기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기사의 어느 부분을 ‘리드’로 잡느냐에 따라 기사가 독자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사물의 어느 면이 중요한가는 관심도에 따라 다르며, 관심도는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외신을 다루어 보면, 같은 사건인데도 입장에 따라, 즉 기자의 국적에 따라 ‘리드’가 제각기 다른데, 이는 곧 사건을 보는 눈에 묘한 차이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베트남의 최후를 보도했던 각국의 신문을 보면 이것을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반공 진영의 나라와 공산 국가의 신문 사이에 베트남 사태를 보는 눈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반공 진영의 나라에서도 보도에 역점을 두는 측면이 나라마다 달랐다.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려면 기사를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조금도 주관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사를 써야만 정확한 보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정확하고 올바른 보도일수록 객관적이기보다 오히려 훌륭한 의미에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알리는 보도일수록 주관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조금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윤봉길 의사가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일본 시라카와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정확한 보도라는 것이 주관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거울처럼 보이는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윤 의사는 일본군의 엄숙한 대식전을 피바다로 물들인 엄청난 사건의 ‘테러리스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문은 마땅히 윤 의사를 규탄하는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가 사건을 정확히 알리는 보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 의사의 장거(壯擧)는 우선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으며, 식민지 제도라는 것이 인류 역사상 배격, 규탄돼야 할 역사적 유제(遺制)라는 판단이 앞서야 한다. 또, 윤 의사의 장거 당시 우리 삼천만 동포가 일제의 착취와 탄압 아래에서 얼마나 신음하고 있었느냐를 윤 의사의 행위와 관련시켜 보아야 한다. 사건을 전체적, 역사적 근거와 조건을 식별하는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판단이 서야만 이 사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윤 의사의 폭탄 투척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에 이 같은 수많은 사실이 횡적으로 종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야 한다.
한 사건을 정확히 보도하는 데 만약 이와 같은 풍부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적 보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사회 과학적 소양과 문학적, 철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대기자 올솝 형제가 “훌륭하고 정확한 보도는 본래 가장 주관적인 것이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점을 지적해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윤 의사의 의거와 같은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일수록, 오히려 고도의 주관적 보도를 통해 진실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문이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가치의 편에서 봐야 하며, 무엇이 근거이고, 무엇이 조건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준칙을 강조하는 것은 기자들의 기사 작성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따라 특정 보도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기사가 보도되게 하려는 외부 세력이 있으므로 진실 보도는 일반적으로 수난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양심적이고자 하는 언론인이 때로 형극의 길과 고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문은 스스로 자신들의 임무가 ‘사실 보도’라고 말한다.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해 신문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려는 권력과 이익 집단, 그 구속과 억압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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