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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 작은 동화

유년기- ‘프라타나스’ 그 울창한 푸르름 아래서……

2008-02-23 

 
 
*등장하는 인물은 가명입니다*
 
내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C 시.
C 시 진입로에 자리잡은 우리 동네는, 2차선 아스팔트 길이 곧게 뻗어 제법 상가가 형성되어있었다. 그리고 아스팔트 길 양편으로는, 아름드리 ‘프라타나스’ 가로수가 줄지어 빼곡히 서있었고, 한여름 울창한 프라타나스 나무에선 매미 울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 평상은, 동네 아저씨들이 점방을 지키다 소일거리로 내기 장기를 두며, 막걸리를 마시던 쉼터이기도 하였다. 그 한여름 시원한 그늘로 사랑을 받던 프라타나스 나뭇잎이 가을엔 낙엽이 되어 아스팔트를 온통 뒤덮어, 동네는 아주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었다.
 
이때가 되면 동네조무래기들에게 놀이 겸 일감이 생기게 된다. 떨어진 낙엽들을 마치 뻥튀기 과자처럼 새끼줄에 차곡차곡 길게 꾀어서,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 쌓아 놓았다. 그것은 훌륭한 불쏘시개가 되었다. 사실 그 당시 대부분의 집들은 연탄불로 난방을 하였지만, 집집마다 마당에 솥 단지 하나씩은 걸어 놓았었다. 그래서 바삭 잘 마른 프라타나스 나뭇잎은, 그 솥 단지에 빨래를 삶거나 혹은 무우청을 삶아 시래기를 만드는 불쏘시개로 아주 요긴하게 쓰였었다. 그 시절 시래기 만드는 일은, 김장만큼이나 중요한 일년 중 대사였었다. 
 
프라타나스 나무는 우리들의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달아 그네를 뛰기도 하고, 축 늘어진 가지에 줄을 매달아 타잔 흉내도 내곤 하였다. 타잔은 아무나 하나……  그러다 떨어져 다리를 다쳐 한참을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프라타나스 나무엔 방울도 열렸다. 그 방울로 또래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도망을 치던 기억이 새롭다.
 
프라타나스 나무는 버짐나무라고도 불렸다. 마치 버짐이 핀 것처럼 나무껍질이 벗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그 나무껍질과 나뭇잎을 모아다 불을 피우고, 그 위에 감자며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하였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이불에 세계지도를 그려, 키를 쓰고 이웃집으로 소금을 빌리러 갔었다. 하지만 동네 아줌마들은 소금보다 엉덩이를 두들겨 패는 일이 더 많았었다.
 
알고 보니 프라타나스 나무는 철학의 나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나무 이름도 철학자인 플라톤의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단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플라톤을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그 나무 그늘에서 철학을 논하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철학자가 되지 못했을까? 나도 프라타나스 그늘에서 동네 조무래기들과 자주 삶을 논하곤 했었는데……? !
아기는 어떻게 생기고 어디로 나오는 것일까? 여자들 가슴에서 어떻게 젖이 나오는 걸까? 동네 이쁜이 문숙이 누나는 왜 동만이 형이랑 밤마다 으슥한 벽돌공장에서 나오는 걸까? 기타 등등……. 하지만 우리동네에서 철학자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읍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는‘ㅁㅁ당’이라는 점포를 열어 장사를 하고 있었다. 각종 생필품과 과자, 그리고 문구를 파는 잡화점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덕에 골목대장 노릇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엄마 모르게 주머니 불룩하게 눈깔사탕을 쎄비가, 동네 아이들에게 곧잘 인심을 썼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맞벌이 부부였던 셈이다. 그리고 우리 집은 도로변에 점포를 몇 개 더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세 놓았다.
 
원래 우리 집 터는 정미소를 했던 자리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울 아버지가 어렸을 때, 나의 증조부와 J읍에서 분가하면서 정미소를 차렸다고 한다. 정미소가 직조공장이 되고, 직조공장이 우산 공장이 되고, 우산공장이 국수공장이 되고, 하여간 뭐하나 진득하니 오래하시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그 많던 재산을 서서히 곶감 빼먹듯 자셨다. 돌아가신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땅문서 한 장 들고 나가 기생집에서 한 두 달씩 기거를 하시며 풍류(?)를 즐기셨다고 한다.
 
언젠가 큰 고모 집에서 할아버지의 옛날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친구분들과 신식양장에 테두리가 큰 챙 모자 그리고 양산을 바쳐 든 여인네들과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아래에 일본말로 뭐라고 써 있었지만 나로선 알길이 없었고, 처음엔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인줄만 알았었다. 하지만 눈을 까 집고 보아도 할머니의 모습은 없었다. 고모 말로는 할아버지가 일본 관광 가서 기생과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하여튼 울 할아버지 국제적인 플레이보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이 기생관광의 효시가 아닐까 잠시 생각을 해본다. 그 뒤로 나는 일본 남정네들의 서울나들이를 욕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울 아버지가 결혼을 하자 집을 아버지에게 물려 주고 시내로 분가해 가셨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집을 수리해서 칸으로 나누어 점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집이 엄청 부자였던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그리 큰 부자는 아니었고, 국민학교 4학년 때 까지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자가 3대를 못 가듯이, 부자 3대 끝자락에서 위태위태한 시절이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증조부는 한 부자 하였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내가 정말 대단한 부잣집 장손이었다는 게 느껴졌었다. 그러면 뭐하나…… 땅 떼기 한 평 못 물려 받고, 다달이 제사만 물려 받은 장손인 걸…… 그렇다고 조상을 원망 하는 것은 아니고, 궁 물을 조금 남겨 놓았어야 하지 않았나……하는 정도의 아쉬움은 있다. 물론 저렴한 생각이라는 거 나도 안다. ^^
 
우리가게 우측에 국수가게, 자전거포, 중국집이 있었다. 이 가게는 우리 집에서 세를 준 점포였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안쪽 동네로 가는 길이 있었고 그 길 건너편에는 쌀 가게가 있었다.
 

(누이들과 함께 집앞에서...가운데 꼬마가 필자)


쌀 가게에는 나를 무척 귀여워하는 진규 형이 있었다. 그 형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쌀 배달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이 형의 자전거 타는 솜씨는 천하일품이었다. 짐받이자전거에 내 키만큼 쌀 가마를 싣고 한발로 페달을 ‘탁 탁’ 구르다 ‘휙~’ 올라타는 그의 자전거 타는 솜씨를 보고 동네 어른들은 “ 천하의 엄복동이가 울고 가겠구먼~ “ 하였다. 엄복동은 일제 때 조선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하여, 일본인들의 콧대를 납 짝하게 만든 자전거 왕으로서 마라톤의 손 기정과 함께 조선의 영웅이었단다.
 
진규 형은 쌀 배달을 나갈 때 나를 앞자리에 곧잘 태우고 다녔다. 나는 갈 때는 엉덩이가 아팠지만, 돌아 올 때 언덕길을 내려 오는 짜릿한 속도감에 즐겁게 따라 나섰었다. 팔뚝에 끔찍한 화상을 입어, 그 상처를 가리느라 한 여름에도 긴 팔을 입고 다닌 진규 형은, 여름에는 유난히 땀을 많이 흘렸었다. 그 땀을 식히려는 듯이, 쌀 배달을 마치고 빈 자전거로 언덕길을 내려 올 때에는, 나를 짐받이에 태운 자전거 핸들에서 손을 떼고, 양팔을 크게 벌려 좌우로 몸을 틀며 균형을 잡는 묘기를 부렸었다. 아마 우리가 폭주족 원조였을 것이다. 나는 그런 진규 형이 오늘따라 몹시 보고 싶다.
 
"진규 헝아! 이제 많이 늙었겠네……? "
 


종기라는 아이가 있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 사귄 친구였다. 그 아이와 나는 아마 말도 배우기 전부터 무수히 싸우면서 사귀었을 것이다. 우리는 참 많이 싸웠다. 싸울 때 나는 그 아이를 ‘똥 oo’ 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둘 이는 온 동네를 빨빨거리며 헤집고 돌아다녔었다. 우리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 까지는 그랬던 것 같았다. 나는 우리동네에 있는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그 아이는 시내에 있는 중국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아이는 화교였다. 중국집이 그의 집이었다.
 
이웃이 중국집인 게 내게는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나는 날이면 날마다 달콤한 짜짱 볶는 냄새에 입안에 침을 꿀떡꿀떡 삼켜야만 하였다. 그러다 가끔씩 종기 엄마가 우리 집으로 화급하게 뛰어 온다. 볶음밥용 밥이 떨어지면 밥을 빌리러 늘 우리 집으로 달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는 날은 내가 행복한 날이다. 빌려가는 밥 대신 짜장 면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그냥 짜 장만 가지고 올 때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짜장 밥을 먹으면 되었으니까……
 
종기 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곤조통이었다. 60년대 중반,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넝마주이고 또 하나는 상이용사였다. 그 상이용사도 종이 아버지는 만만하게 보지 않을 정도였다. 팔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은 그 시절 우리 같은 어린 조무래기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국가로부터 별다른 보상과 도움을 못 받았었다. 나라 살림도 가난 했을 뿐더러, 비극의 전쟁이 남기고 간 상이군인이 전국에 넘쳐났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그들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였다.
 
그들은 외로웠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팔 다리를 잃었지만 돌아오는 건 멸시와 냉대였으니…… 일자리도 없고………  먹고는 살아야 하고…… 그래서 그들은 사회에 폭력적이고 반항적으로 대하였다. 경찰들도 그러는 그들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팔 다리를 바쳐 나라를 구한 그들을, 경찰이라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리라. (물론 상이군인 전체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오해없길.........)
 
우리동네에 자주 나타나는 상이용사가 한 명 있었다. 영화 배우 ‘잭 파란스’를 영화에서 처음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었다. 그가 상이용사와 너무 흡사하게 닮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가끔 영화 속에서 ‘잭 파란스’를 보면은 그가 생각나기도 한다. 목다리를 집고 한 손은 쇠 갈고리 한 그가 나타나는 날에는 동네의 선술집이 시끄러운 날이었다. 그는 점포마다 돌아 다니며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였다. 자신의 팔 다리 값을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주었다. 하지만 종기 아버지에게는 얄짤없었다.
 
종기아버지는 화가 나면 중국말로 고함치듯 소리를 지른다. 도대체 뭔 소리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종기는 다 알아듣고 얼굴이 파래진다. 더욱이 종기아버지가 술에 취하는 날에는 종기네 식구가 우리 집으로 피난을 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 양반이 우리 엄마 말은 참 잘 들었다. 우리 집까지 쫓아와 종기엄마를 팰라치면 우리엄마가 나서서 조근조근 말로 진정시키고 들어가 자라고 하면 곧잘 말을 들었다. 물론 엄마가 집주인인 탓도 있었겠지만 나는 아마도 우리엄마가 한 미모한 게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
 
종기아버지는 전과가 있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나질 않던 시기에 그는 사람에게 상해를 입혀 감옥에 갔었단다. 동네 형들에게 전해들은 전설 같은 그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날 종기 아버지는 타 지역 사람 여러 명과 식당에서 싸움이 벌어졌단다. 중국집 의자가 ‘획- 획-‘  날라 다니고, 유리창이 박살 나고, 그 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 구경하고…… 아무튼 대단하였다고 한다.
 
화를 못이긴 종기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화재진압용 갈고리를 들고 가, 한 사람의 허벅지를 ‘팍-’ 찍었다고 한다. 그 당시 식당에는 의무적으로 현관입구에 방화도구를 설치해야만 하였다. 빨간 드럼통에 물과 모래를 항시 채워놓고 삽이며, 도끼며, 갈고리를 게시 대에 걸어 놓아야만 하였다. 종기아버지는 그날 처음엔 도끼를 들고 가려고 했었는데, 도끼를 빼어 든 순간 도끼 날이 자루에서 쏙 빠지더란 다. 다행이었다. 만약 도끼를 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진압은 확실히 되었단다. 화재가 아닌 싸움이라 그렇지……
 
백차가 오고…… (그때는 경찰차가 하얀 지프였다.) 경찰이 종기 아버지에게 수갑을 채우고 백차에 싣고 떠나려는데 그가 동네사람들을 바라보고 유유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단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영화‘영웅본색’이 그의 전설을 패러디 했다나 어쨌다나…… 어쩜 주윤발처럼 성냥개비를 지근거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에 알려진 싸움의 원인은 타지 인들이 종기아버지에게 ‘짱 꼴라’라고 부르는 데서 시비가 붙었다 한다.
 
우리!
화교 분들을 절대 ‘짱 꼴라’  라고 부르지 맙시다!!
 
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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