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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짐 푸는 중

서북청년단은 살인을 일삼은 정치깡패조직이었다

2014.9.30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서북청년단이 서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을 철거하겠다며 가위를 들고 난동을 부리다가 경찰에 제지당했다고 한다.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해괴한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현대사에서 서북청년단이 저질렀던 악행을 안다면 감히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수없이 많은 사람이 흘렸던 피에서 정녕 우린 배운 것이 이렇게도 없을까? 아무리 유신 독재자의 딸이 정권을 다시 잡았다 해도 이건 정말 아니지 싶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이런 정치깡패단체가 2014년에 다시 발호하는 것은 박근혜정권이 야비한 기회주의자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재 회귀성 증후군. 더도 덜도 아닌 박근혜 저들 정권의 양식은 딱 요 모양이다. 긴 동면을 끝낸 뱀들이 어두컴컴한 굴에서 스멀스멀 대가리를 치미듯 유신독재시절 난립했던 관변보수단체가 다시 활개를 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복기해보자.

이승만, 박정희시대를 거쳐온 역사에서 증명된 독재자의 특징은 권력 만능지향적이고 비판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아첨으로 권력자의 환심을 사려는 비정상적인 기회주의자들이 들끓었다. 그런 비정상들이 정상을 포획하고 무력화한 나머지 우리는 긴 암흑의 시대를 인내해야만 했고 겁박 된 정상을 구하고 대명천지를 쟁취하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 달콤함에만 빠졌던 것일까?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이 해괴한 현상.
맥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우리.
서북청년단은 살인을 일삼은 정치깡패조직이었다.

거기에 '비정상의 정상화'란 국정운영 기조를 발표하는
 
'아~頂上인 듯 正常 아닌 頂上 같은 너 어어~'.

수많은 비정상을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며 희대의 살인마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뉴라이트 교과서를 만들질 않나,
부정선거와 공안통치를 지향하는 국정원을 감싸고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짓밟는 인터넷검열과 사이버 모욕죄를 신설하려는 등등의
비정상을 정상인 것처럼 되돌리려는 염치없는 짓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다.

그래서 학살자 히틀러를 보위했던 나치 친위대처럼
이승만을 보위하며 수없이 많은 양민을 학살했던 서북청년단이 다시 발호하는 것이다.

좌우 이념대결이 한창이던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에서 창단한 서북청년단(서청)은 김일성 폭압 정치에 견디지 못하고 북에서 남으로 쫓겨온 지주 및 기독교계 인사 그리고 민족주의자나 일부 친일파 등으로 이루어진 반공단체였다.

강령으로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균등사회의 건설, 세계평화에 공헌 등을 내세웠지만, 좌익세력을 테러하는 극우세력집단의 돌격대였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독재자 이승만의 친위대를 자처하고 수많은 사람을 때려죽이는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의 악행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인 되어버린 제주4.3사건, 그런 제주 4.3 사건에 투입되는 것에 항명하며 벌어진 또 하나의 학살극 여수.순천 사건에서 저들이 관여하여 죽어간 수많은 양민만 보더라도 서북청년단은 지난 현대사에서 '초슈퍼울트라 캡숑 킹 왕짱 비정상' 조직이었다.

4.3도민토론회/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한다' 일시: 2009년 12월 11일

발표자-정종식/건국대 역사교육 석사

"서청 제주도 지부가 정식으로 발족된 것은 1947년 11월2일이었습니다. 위원장에 장동춘이 선출되었는데, 발족 훨씬 이전부터 적지 않은 서청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키고 있었습니다."

"서북청년단 단원 가운데에는 이북에서 급히 도망쳐 나온 연유로 빈털터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주에서 무전취식을 일삼으며, 민가에 가서 쌀과 돈을 강요했고 관공서에 가서도 '국민배급'을 달라고 떼를 쓰고 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들고 다니며 반 강압적으로 파는 단원들도 있었습니다. 4.3항쟁이 일어난 후 성산포 등지에서는 물건 구매에 냉담했던 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빈곤한 상황이 잔혹한 테러와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야기한 원으로 유추된다. 이들의 명목은 '반공'이었지만  좌익 뿐 아니라 민간인들 심지어 우익 인사들에게도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러 금품을 갈취하였으며, 처녀들을 강제로 아내로 삼는 행위가 다반사였다."

●발표자-김평선/제주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활동자금을 모으기 위한 서북청년단은 강매, 강제모금을 취했으며, 관공서 조급문제, 심지어 인사문제에까지도 개입했다"며 "이러한 과정에서 폭력이 사용되었으며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미군정 CIC에도 관심사항이 되었다"

"무릉리에서 서북청년 경찰대에 의해 박행구가 구타당하고 총살당하는 일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고문, 구타, 살해 등의 강도높은 폭력은 남로당의 핵심 지도부들의 원성을 가져왔다. 서북청년단의 강제모금과 관공서 인사문제 개입과 사적 처벌 등의 폭력남용은 제주도민의 불만을 초래시켰다. 오히려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무장봉기 집단과 제주도민의 미군정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불만을 매기하는 역할을 했다."

출처/ http://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80559

 
이날 발표에 의하면 4.3발발 이전까지 제주에 파견된 서청단원의 수는 제주읍 300명, 각 면마다 40-50명씩 총 760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47년 제주도에서 총선거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으로 서청은 500명의 대원들을 '경찰'로 임관하여 김태일 경무부 경무과장의 지휘하에 현지 경찰전투대에 편입돼 토벌전에 나섰다. 그리고 여순사건 직후 1948년 11-12월 사이에 서청단원은 최소한 1000명 이상이 경찰이나 경비대 옷을 입고 추가 투입되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양관표 사례(고경흡 증언)
“양관표는 산에 안 올랐다. 그는 서북청년으로 구성된 특별중대에 잡혀갔다. 나도 같은 시기에 잡혀갔다. 국민학교 교실마다 칸막이해서 취조실을 만들었는데 귀를 대면 다 들렸다. 두드려 맞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다. 어찌 동족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서북청년들이 몽둥이로 치니까 뼈가 부서진다. 호흡이 그르릉 그르릉. 누워서 팔을 들면 건들건들. (양관표의) 뼈가 다 부서졌다. 생나무로 막 패니까. 양관표는 이 고문으로 사망했다.”

●홍경토 증언 사례
“창고 안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갇혔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그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들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좌봉 사례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고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 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 싫증이 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녀 한 명과 총각 한 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이 아니었어.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가자 주민 4명을 끌고가 총을 쏘아버렸어.

●김옥녀 사례: 고문으로 허위자백서에 도장을 찍음
“그때는 ‘사람 죽였냐’고 하면 ‘죽였다’라고도 할 판이었습니다. 옷도 모두 벗겨 심한 고문을 하는데 어떻게 안 했다고 합니까. 전기고문을 그렇게 받으면 아기도 못 낳는다고 말했습니다. 난 그때 쇠좆매로 맞은 것 때문에 지금도 허리 양쪽이 다 튀어나왔습니다.”

●조천면 교래리 사례
“그날 남편과 조카는 미리 피신했고 나는 아홉 살 난 아들, 세 살 난 딸과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에게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 하고 막 빌었어요. 그러나 군인들은 나를 탁 밀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 하고 내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 발을 쐈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 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이 나가버린 후 아들이 불에 탈까봐 마당으로 끌어낸 후 담요 끈을 풀어 업었던 딸을 살폈지요. 아기를 등에서 내려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다리에 손바닥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습니다.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다리까지 부숴놓은 겁니다. 난 지금도 허리를 못 쓰고 딸은 잘 걷지 못하는 불구자입니다.”

●제주읍 농업학교 수용소 사례
제주도 서북청년회 김재능 단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금품갈취와 고문은 물론 살인과 부녀자 능욕을 일삼았다. 김재능은 특히 물품을 달라고 강요하다가 거절당하자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서청 사무실로 끌고가 타살했다. 이에 관해 미군 보고서에는 “1948년 11월9일 서북청년회 단원이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폭행 치사했다. 서북청년회는 공산분자로 알려진 그를 단지 취조할 의도였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고 기록돼 있다.

●애월면 하가리 사례
“군인 세 명이 집으로 들어와 잠자던 남편을 끌어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관총으로 쏘았다. 총알이 몸 여기저기에 박혔는데 빨리 안 죽으니까 그랬는지 칼로 목을 잘라버려 피가 낭자했다. 난 그들을 군인이 아니라 인간 백정으로 본다.”

●애월면 소길리 원동마을 사례
“군인들이 플래시를 들고 다니며 주민들을 집합시켰으니 새벽 5시께였을 겁니다. 그들은 주민들 손을 뒤로 돌려 결박시킨 후 마치 굴비 엮듯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밧줄로 이었습니다. ‘폭도가 있는 곳을 가리키라’고 했지만 누가 그걸 알 수가 있어야지요. 결박당한 채 폭도를 찾아 이리저리 끌려다녔습니다. 새벽부터 굶은 채 하루종일 그 짓을 하다 오후 5시경에야 다시 주막집 앞으로 돌아왔지요. 처음엔 우릴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한때 결박을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군인 한 명이 어디론가 무전을 치더니 ‘너희는 10분 내로 총살된다’고 하더군요. 곧 애월리 쪽에서 군인 차가 올라왔지요. 난 급히 결박을 풀어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그들이 서로 경례하는 사이에 숲으로 뛰었습니다. 잠시 후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군인들은 시신 위에 식량과 이불을 덮어놓고 불을 지른 후에야 가 버렸습니다.”

●표선면 토산리 사례
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주민들을 모두 집합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분리했다. 또 여자들에게는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20세 미만의 젊고 예쁜 여자들을 분리했다. 군인들은 이들을 표선국민학교로 끌고 가 감금했다가 주로 12월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총살했다. 그날 이후 토산리는 청년이 없는 마을이 됐다.

●애월면 하귀리 사례
“경찰은 주민들을 비학동산에 모이게 한 후 가택수색을 벌여 집에 남아있던 두 사람을 끌고 왔습니다. 광령리에서 소개돼 온 부자(父子)인데 부친은 70대 노인이었고 아들은 35세 정도였습니다. 경찰은 먼저 아들을 패기 시작했습니다. 부친이 ‘우리는 소개민이다. 아들은 4대 독자니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곧 부친을 구타해 죽였습니다. 아들은 도망치다 총에 맞았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는데 이번엔 어떤 여자를 지목해 끌어냈습니다. 25세쯤 되는 임산부였습니다.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찔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돼온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도망쳤지만 다시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경찰은 이미 초주검이 된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찌르지 않으면 대신 너희들이 죽는다’는 협박에 단장인 여자부터 차례로 찔렀습니다. 내 차례가 되기 전 그 처녀는 죽었습니다. 경찰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 되니 그렇게 한 것입니다.”

●표선면 가시리 사례
 60대 노부부인 안만규 김인하는 손녀와 손자를 데리고 냇가로 피신해 굴속에 숨었다. 하지만 아기 울음소리가 새 나가고 말았다. 진압군은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들 가족은 운명을 같이했다.
 “토산리 창고 부근에서 총살이 있었는데 총살할 때 박수를 치라고 했다. 총살 때 아기가 폴폴 기어서 위로 올라오니까 아기에게도 총을 쏘았다”

●조천면 와흘리 사례
“버스를 타고 제주농업학교에 도착하자 군인들은 갑자기 우리들 손을 철사줄로 결박한 후 10명씩 엮어 스리쿼터에 태웠습니다. 박성내에 이르자 지휘관은 ‘여러분이 곱게 죽어주면 가족에게 알려 시신이라도 찾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총살에 앞서 우리들의 주머니를 뒤져 돈과 귀중품을 털었습니다. 냇가의 바위 위로 끌고 가 묶여 있는 10명 단위로 총을 쏴 떨어뜨렸습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팔에 총알을 맞은 나는 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가 다음 사람들이 끌려오는 3∼4분 사이에 철사를 끊고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거기서 새벽까지 숨어 있다가 현장을 벗어났습니다.”

●제주읍 도평리 사례
1949년 1월3일 총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동무, 동무”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 중엔 인공기를 든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이들은 무장대가 아니라 인근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이었다. 일부 주민은 눈치를 채고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대한민국 만세’까지 외쳤지만 결국 70명이 총살당했다.

●제주읍 용강리 사례
“그날 다급히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노약자들은 마을 안 ‘당카름(나무가 우거진 곳)’과 ‘대련수(하천 변) 쪽으로 달아났고 젊은 사람들은 늘 하던 대로 동쪽으로 뛰었습니다. 군인들이 마을 서쪽(오등리 죽성마을)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날은 죽성마을 주둔군뿐 아니라 아랫마을인 함덕리 주둔군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니 꼼짝없이 포위된 것이지요. 잘 뛰지 못하는 노약자들이 중간에서 붙잡혀 많이 죽었습니다. 바위 틈에 머리를 박고 숨진 사람이 많았고 나무 위에 올랐다가 총에 맞아 나뭇가지에 걸쳐진 시신들도 있었습니다.”

●빌레못굴 희생 사례
“토벌대가 ‘살려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모두들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끝내 나가지 않아 살았고 밖으로 나간 이들은 바로 굴 입구에서 학살당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들이나 송시영의 아들은 당시 서너 살이었는데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예쁘고 잘난 아이들이었습니다. 토벌대는 그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였습니다.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 살 난 딸을 업고 굴 속 깊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굶어죽었습니다. 이들의 시신은 후에 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됐습니다.”

●조천면 선흘리 사례
11월25일부터 연 사흘째 주민들이 은신했던 굴이 잇따라 발각됨으로써 대량 학살의 참극이 빚어졌다. 11월25일 ‘반못굴’을 발견한 군인들은 그 안에 숨어 있던 주민 15명을 끌어내 즉결총살했다. 다음날엔 ‘목시물굴’을 찾아내 아기 업은 여자와 노약자는 함덕국민학교로 끌고 갔고 나머지 주민들은 총살 후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태웠다. 11월27일엔 웃밤오름 부근의 ‘밴뱅디굴’에 숨었던 사람들이 총살당했다. 당시 구사일생한 김형조씨는 억울한 사연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희생자 명단을 적어 항아리에 감춰뒀다. 선흘1구는 당시 300가호였는데, 김씨에 따르면 세 굴에 숨어 있다 목숨을 잃은 주민은 157명에 이른다.

●조천면 북촌리 사례
군인들은 군경가족을 나오도록 해 운동장 한편에 따로 세웠다. 어린 학생들을 일으켜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들을 몇십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 주민학살극은 오후 5시께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경찰관이던 김병석의 증언에 따르면 애초 군인들은 박격포를 쏴 주민들을 한꺼번에 죽일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적을 살상한 경험이 없는 군인들에게 ‘실전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총살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날 희생된 주민은 약 300명에 이른다.

●제주읍 삼양리 사례
“서북청년회 출신 정주임은 너무도 잔인했어요. 여자들 옷을 벗겨 더러운 행위를 하는 것도 봤습니다. 삼양지서 옆 밭에서 남자고 여자고 수십명씩 잡아다 죽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쏘아 죽일 것이지 그 마을 대동청년단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도록 강요했습니다.”

출처/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3/04/25/200304250500011/200304250500011_1.html

 

그 밖에 서북청년단은 전에 쓴 '이승만은 학살자였을 뿐이다'란 글에 나와 있는 수많은 양민학살사건에서 이승만의 친위대로 직. 간접적으로 관여하였으며 해방 후 친일파나 기회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한 추악한 도구로 쓰인 정치깡패조직이었다.

그런데 이런 흉악한 단체가 다시 발호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역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으나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 앙드레 지드

 
 
하지만, 어느 초등학생이 이 명제에 관해 아주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한 것이 있다.


영화 <스윙보트> 중에서......

제발 과거를 기억하란 것이다.
그리고 투표를 잘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같은 방법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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