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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 작은 동화

유년기- 우리 아버지는 건맨

2008-02-23 01:16:29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피조물인 쥐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

그리고 두 생물간의 타협할 수 없는 그것!

 

오늘은 울 아버지 이야기를 하겠다. 전에도 한번 울 아버지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지만, 사실 이 공간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하지만, 때론 딱딱하고 무거운 정치이야기 보다 삶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서 '시끄럽고 탐욕스런 쥐'들은 반드시 쫓아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게, 훨씬 더 머리 속에 쏙-쏙- 잘 들어간다고 나는 생각을 한다. 아님 말고....... ^^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속 정(情)이 많으신 분이었다. 지금의 나처럼 내 아들들에게 객쩍게 너스레를 떨며 정을 나누지 않으셨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울 아버지의 정은 등 뒤로 배어 나오는 파장이 짧은 그림자로서만 느낄 수가 있었다.

 

울 아버지 술 한잔 걸치신 어느 늦은 밤.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시며 방으로 들어 오셔서, 기분 좋게 화내듯 만류하시는 어머니의 손을 한사코 뿌리치시고는, 곤히 잠든 우리들을 다 깨우시는 걸로, 숙명처럼 짊어져야만 했던 당신의 권위를 마치 무겁고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술기운을 빌어 살그머니 내려 놓으셨다.    

 

그리고는 아직 때이른 추운 봄날, 토굴 밖에 머리를 빼 꼼이 내민 어린 곰 새끼들마냥, 이불을 휘둘러 감싸고 앉아 부시시- 눈 비비는 우리 오 남매(막내가 태어나기 전)에게, 그 동안 당신의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셨던 정을 바겐세일 하듯 흥청흥청 퍼 주셨다.

 

그런 날은 우리는 엄청 수지 맞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위태위태 흔들거리시며 당신이 입고 있는 양복의 그 많은 주머니 하나 하나를 손으로 홀랑당 까 뒤집고는, 일 원짜리 동전한닢까지 닥닥 긁어 우리 앞에 모두다 꺼내 놓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평상시엔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당신의 어깨를 쫙- 펴시고는 마치 승전국(勝戰國)의 장수처럼 우리 오 남매에게 당당하게 뽀뽀를 요구하셨다. 그러면 방안은 금새 야단법석 북새통을 이루고 만다. 가슴이 봉긋나기 시작하여 자지러지는 큰 누이만 빼 놓고, 우리는 앞 다투어 즐거히 잔 수염에 까칠까칠한 아버지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우리 오 남매는 그런 서투른 복종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달콤한 아버지의 전리품을 받아 챙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일년에 서너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아버지가 바깥 세상에서 그만큼 패배한 날이 더 많았다는 것이기도 하리라. 이제 내 유년의 추상은 점점 빛을 바래 가지만 그때 기억 속에 캡쳐된 그 한 장면이 내 인생의 오마쥬이다.       

 

내 기억 속엔 없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알아 주는 큰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정미소도 하고 조상대대로 물려 받은 토지도 꽤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미소는 큰 누나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접었다고 한다. 아마도 대책 없이 일을 벌리시고 접기를 반복하시던 할아버지의 사업 수완은 그리 듬직하지가 못했었나 보다.

 

큰 누이의 기억을 빌리자면, 큰 누이는 동네 사람들에게 정미소집 손녀딸이란 애칭을 들으며 자라났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넉넉했던 인심 때문인지, 동네사람들은 기울어져가는 우리 집 가세 와는 달리 큰 누이를 정미소집 손녀딸이라 하며 신발에 흙이 묻을새라 무척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후. 정미소 건물은 아버지가 물려 받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살림집으로 개조를 하면서 칸을 나누고 몇 개의 점포로 만들어 세를 놓았다. 그 점포 하나에 어머님은 OO당이란 잡화점을 여셨다.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큰 누이와는 달리 00당집 아들로 불리며 자라났다. 신발에 흙 졸라 묻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어쩌다 가끔 꿈속에서 그 공간에 서있는 나를 볼 수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마치 혜성의 긴 꼬리처럼 그때 그 시간의 잔영이 지금도 내 기억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쓸데없이 글이 또 늘어진다. 이게 내 스탈이다. 한두 번 겪는 거 아닐 테니 이해하길 바란다.

 

아무튼,

쥐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지금은 도로 개발로 없어진 나의 생가는 정미소를 개조한 집이었기에 천장과 지붕간의 공간이 꽤 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쥐들이 뛰어 놀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더구나 쌀을 취급하던 정미소자리였으니 쥐들의 세계에서도 명당으로 소문이나 대를 물리면서 터를 잡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쥐들은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 위인 천장에 서식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잠든 야간에 주로 활동을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가 일상에 지친 나머지 피곤함에 깊이 잠이 들면, 쥐들이 아무리 발광을 해도 그 시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쥐들이 있는지 조차 인식을 하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지내기도 한다.

 

간혹, 잠이 안 와 잠자리를 뒤척일 때, 아무런 생각 없이 천장을 올려보다 쥐들이 지린 오줌자국을 문득 발견하곤 아주 불쾌해 한다. 하지만 그 불쾌감은 잠깐이고 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아주 드문 일이다. 그것은 쥐 오줌 자국이란 눈에 늘 보여 익숙한 것이었고 우리의 감각은 그것 또한 세상의 일부분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왜 그리 쥐들이 많았던지...... (지금도 많지만......)

그래서인지 쥐 박멸이 국가 정책의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합당한 정책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좋은 정책은 지속적으로 시행을 해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좋은 정책이 있었는지 조차 잊고 사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세상이 지금 온통 쥐새끼 천국이다. 젠장!)

 

어느 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한참 전이었던 것 같다. 그 해 우리 집 천장에 서식하던 쥐들이 유난히 극성을 부리던 이상한 해였다. 평소에는 깊은 밤에만 활동했던 쥐들이 대낮에도 이상하게 난리법석을 떨었다. 쥐들의 세계에서 뭔 조짐이 일어나는 분위기였다. 개체수가 갑자기 증가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번식이었다. 쥐들은 원래 서식 환경이 좋아지면 번식 능력을 최대로 끌어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상모든 생물은 번식을 최우선으로 디자인 되어있다고 한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숙명인 것이다. 나도 생명이면 쥐 또한 생명. 그렇기 때문에 쥐들이 이 세상에 존재 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해서, 그들도 살아가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나 역시 지구의 한 식구로 인정하고 공존할 용의가 있다.

 

문제는 쥐의 번식력이 타종의 번식력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이다. 쥐 암컷은 3주간 임신으로 한번에 10마리의 새끼를 낳고 1년에 6∼7회 출산한다고 한다. 한 쌍의 쥐가 1년이면 1500마리로 불어난다는 것이다.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만일 이를 방치한다면 지구의 생태계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지구생명체의 멸망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가 있기에 내가 두려움이 생기는 게 당연 할 것이다.

 

울 아버지 쥐들이 하도 발광을 해서인지, 천장을 올려보는 횟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어머니는 천장에 대고 소리를 '홱- '지르시며 베개를 냅다 집어 던지시는 과격함도 보이셨다. 그러면 우리들도 따라 하며 킥킥- 대곤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와는 달리 울 아버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감내하려는 듯 아버지는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것이 아버지 스탈 인걸 어떡하랴.

 

어느 일요일 오후. 아버지와 나 이렇게 단 둘이 방안에 있었다. 울 아버지는 책을 보시고 나는 딱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천장에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번개같이 아버지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 소리는 이제껏 들려오던 소리보다 워낙 컸기 때문에 아버지마저도 흠칫 하셨다. 천장에서 들려온 소리는 마치 그 '거시기' 가 '공구리' 칠 때 시멘트를 냅다 처붓는 소리 같았다.

 

울 아버지 잠시 나를 꼭 껴안아 주시고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셨다. 그리고 다락문을 드르륵- 여시더니 먼지가 뽀얗게 쌓인 공기총과 납 총알을 꺼내 오셨다. 나는 물끄러미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아버지 얼굴은 비장함이 서려 한기를 느낄 만큼 서늘했다. 드디어 울 아버지 뿔났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울 아버지 침착하게 공기총을 꺾고 장구 모양처럼 생긴 자그마한 납 총알을 장전하였다. 그리고 개머리판을 뺨에 밀착 시키고는 천장의 어느 한곳을 조준하셨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리셨다. 물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련의 그 행동은 마치 서부영화의 건맨을 보는 듯 하였다. 와우!

 

잠시 후 쥐들이 다시 발광을 하고 그 쥐들의 움직임이 미세하게나마 천장의 표면에 포착이 되었다. 그때, 울 아버지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기셨다. “팍- “ 그리고 몇 발을 더 쏘셨다. 그러자 천장은 납 총알로 인해 자그마한 구멍이 여러 개 생겼다. 그러나 쥐들은 거짓말 같이 조용해졌다. 쥐들이 맞아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후로 방안에는 예전처럼 공구리 치듯 요란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후부터이다. 세상엔 공짜가 없는가 보다. 얻은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 이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섭리와도 같다.

 

여름이 오고 장마철이 되자. 천장에서 비가 새기 시작했다. 정미소를 했던 건물에 지붕이 양철로 되어있던 탓인지 몇 개의 납 총알이 양철지붕을 뚫고 통과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울 어머니 어린애처럼 총질을 해서 비가 샌다고 아버지를 원망하셨다. 나는 그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과연 아버지가 틀린 행동을 한 것인지 어쩐지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잔소리에 아무런 대꾸도 않으셨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조용해지면 방안 군데군데 늘어 놓은 양재기에서 빗물이 퐁당퐁당 실로폰을 쳤다. 나는 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었지만 그러다간 울 어머니의 꼬인 심사를 더 꼬이게 하는 것이기에 눈치가 빠삭한 나는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에휴~ 불쌍한 울 아버지......

 

이윽고 지루한 장마가 지나가고 파란 하늘이 화창한 어느 일요일. 아버지는 동네에서 사람 좋고 솜씨가 좋은 털보아저씨를 불렀다. 그리고 하얀 종이에 당신이 손수 뭔가를 그린 도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아버지와 털보아저씨는 한참을 의논하시더니 높다란 사닥다리를 처마에 걸치고 까마득한 지붕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톱질과 망치소리가 동네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털보아저씨는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그러다 무거운 거라도 들라치면 구성지게 타령도 불러 제켰다. 털보아저씨 아마도 기분이 좋았는가 보다.

 

그 다음날,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나.......

 

(사진이 있었으면 올려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이사를 너무 자주 하다 보니 관리를 소홀로 옛날 사진이 많이 없어져 버렸다. 정말 안타깝다.)

 

방안에 누우면 파란하늘이 보였다. 솜털처럼 하얀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가고 어떤 시간에는 해님이 얼굴을 잠시 디밀며 방안을 몰래 훔쳐 보기도 하였다. 밤에는 달님과 별님도 마실을 왔다. 우리 오 남매는 그들과 노닥거리는라 잠자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고 울 어머니의 잔소리도 덩달아 높아 가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설탕가루를 뿌린 듯 반짝반짝 빛나는 은하수가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했기에.......

 

울 아버지 마법을 부리신 거다. 구멍 난 양철 지붕을 걷어내고 그곳에 유리 한 장을 얹어 우리 오 남매에게 파란 하늘을 선물하셨다. 나는 지금도 가끔 하늘을 쳐다보지만 그때 그 시절, 우리 방에서 올려보았던 그 시리도록 파란 하늘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 후로 우리 방에서 쥐들이 사라졌다. 이제는 어두웠던 천장에도 햇빛이 들어와 어둠을 좋아하는 쥐들이 이사를 가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천장을 바라보는 울 어머니 환하게 웃으시고 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무뚝뚝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지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