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10월 22일, 인터넷이란 공간에 처음 올린 글. 올렸던 공간은 " 정치 포탈 서프라이즈- 노짱방". 서버가 날아가 글은 찾을 수없슴. 다음 블로그에서 백업 보관.
비속어가 많아 주의 필요함)
이 X같은 현상을 뭐라 말할까,?
온갖 독재와
불법구금,
고문살해,
조작판결로 형장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한 많았던 세상을 등진 불쌍한 영혼들,
5월의 광주하늘 아래에서
권력에 미친 X같은 정치 군인들의 야욕에 맞서 몸부림치다
빨갱이 폭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거리 거리에서 가슴 아프게 쓰러져간 슬프디 슬픈 영혼들,
고문의 후유증으로 불구가 된 몸으로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중앙정보부, 보안사분실에서
인간말종들이나 저지르던 악랄했던 고문행위가 사라져
이제는 밝은 세상이 된 조국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위안을 삼고
지난날 그 악몽 같은 기억을 잊어가는 차에
과거의 그 X같은 인간들의 정치 철학을 물려 받은 것들이
단군이래 가장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이 시대에서
자유민주주의을 구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내세우고
곧 치매 걸려 뒤질 꼴 통 보수 지식인들이 우매한 노친네들을 부추켜
서울역 앞에서 未국기 흔들며 지랄난리를 떠는,
작금의 X같은 행위을 바라보며 그들은 뭐라 말할까 ?
과연 우리는 일제 탄압에서 해방을 하고
친일파 후손들이 저지르던 독재파쑈의 암울 함에서 완전히 벗어 난 것 일까……..?
좃또!! 아니다.
아직도 우리는 갖은 술수와 악행으로 불쌍한 민초들의 등골을 파먹으며 한평생 호위호식 하다
뒤져버린 친일파, 독재파쑈 새끼들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주 X같은 악귀들이다
그 X같은 악귀들이 지옥의 나락에서 좃잡고 반성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 대명천지에 나돌아 다니며 우리의 영혼을 어지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친일파, 독재파쑈 새끼들이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 그곳이 졸라 만원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 악귀들을 관속에 고이 모셔 지하실에 숨겨놓고
밤마다 관 뚜껑을 열어대는 좃선 찌라시가 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쓰벌놈들! ‘
여기서 나는
지난날 나의 무지함으로 인해 부끄러웠던 과거를 돌이켜보며
위와 같이 믿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부패한 언론의 패악질이 얼마나 한 사람의 사고를 무지하게 만드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유시민의원과 동갑이다
사적으로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
왜?
나 보다 더 많이 배워 총명해서 좋고
의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그의 진정성을 존경한다
나는 그처럼 공부할 때 공부를 안했고
동시대를 살아오며 세상의 불의에 항거해야 할 때
유시민 그처럼 어떤 식으로도 행동을 했어야만 하는 시대적 사명을
나는 애써 외면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1972년 10월 유신
나의 중학교 1학년 때.
우리는 10월유신에 대해서 사회 선생님한테 수업을 들어야만 했었다
선생님 왈
“우리나라가 하고있는 민주주의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서 우리 몸에 맞지 않으니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쳐 써야 만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한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물론 대갈 빡 어린 우리들이야 그런가 보다 했지
그리고 그 당시 그네아빠는 우리들한테는 카리스마가 졸라 넘치는 나랏님 이었걸랑
암 튼 어린 탓에 항거 못했어 씨바!
어련히 어른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하면서………….
웬걸
시간이 쫌 지나자 세상이 졸라 어수선하면서 공포 분위기로 흘러갔지
대학생 성님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줄 창 데모만 하는 거여
‘저 성님들은 대통령이 좋은 나라 만들겠다는 데 왜 들 그랴………?’
내 생각이 딱 그랬어
내 고향은 충청도지방 한 도시였는데 대학교가 두개 있어서 졸라 시끄러웠던 것 같았었다
그 당시 좃선찌라시가 10월유신을 바라본 기사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
"헌법 기능의 일부 정지와 아울러 이에 따르는 몇 가지 조치가 선포된 것은
새로운 헌정질서의 존립을 위하여 만부득한 조치"
<출처-오 마이 뉴스>
‘씨댕이덜!!’
이렇게 정부정책에 적극 찬성하는 기사를
지금 단 한번만 이라도 좃선찌라시에 실리는걸 본다면
내가 박그네를 책임지고 시집 보내주겠다
한번이 아니라 두번 이라도 보내 줄 껴
10월유신 이라는 게 좃또 유정회라는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대통령 한 오백년 해먹겠다는 독재헌법이었잖어?
그땐 그게 그렇게 황당한 법인지 몰랐었다
신문이고 선생덜 이고 죄다 거짓부렁으로 애들을 가르쳤걸랑
그리고 그 당시 엄청난 인기드라마 ‘여로’ 를 보는 재미로만 살았지
유신이고 나발이고 내게는 관심 밖 이였던거다
( 아! 짱나! 지금 독수리타법으로 워드에서 작업 중인데
밑에 빨간줄이 자꾸 쳐지는거여 아마
띄어쓰기하고 받침이 틀렸다는 말인가 본데
이거이 내게 졸라 어려워 걍 쓰으니까 초딩이라고 시비 걸지마!
나도 내가 무식한거이 창피하니까 )
그네아빠가 통일주체국민회의(유정회) 꼭두각시를 앞세우고 대통령에 취임하자
우리들의 대학생 성님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고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 나왔지
참으로 겁도 없는 성님들이었다
그 당시 나라 분위기는 중앙정보부의 무지막지한 감시와 인권유린으로 사회전반에
공포가 만연했던 시절이었다
잘못 입 벙긋하면 정보부로 끌려가 치도곤을 당해서 송장이 되어 돌아온다는 소문이
어린 우리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감히 불평불만을 할수도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북한만 통제와 억압을 한 것이 아니라 남한도 그에 못지 않은 공포정치로
어른들은 그저 쉬쉬하는 그야말로 매일 매일 글루미선데이였다
“불평,불만 = 빨갱이”
이런 등식이 성립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데 저 등식을 지금 현상황에 그대로 대입 시키면
수구 꼴통들 다 빨갱이 아녀……………?. ’)
내 자랑이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멸공”
“반공”
“때려잡자”
“간첩”
이런 글씨는 읽을 줄 알았다. (천재는 안되도 수재는 된다는 야그)
지금처럼 조기교육이 없었던 시절 담벼락 곳 곳에 붙어있던 반공 표어는
어린시절 우리들의 학습지이고 담벼락은 연습장이었으니까………….
“때려 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무진장 많았다 저런 표어 방방곡곡에…….
“무~찌르자 공산당 몇천만이냐~ (“ 2천만” ) 대~한넘어 가는 길 저~기로구나~”
(요딴 가사로 노래 부르며 고무줄 놀이하던 계집아이들은 잘 살고 있는지……… )
내게는 비상 계엄령하에서 대학생 성님들의 데모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난동 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긴급조치가 수시로 발호 되고 군인들이 길거리 곳곳에 무장 배치되어
어른들은 숨도 못 쉴 것 같은 그런 숨막히는 시절,
그네아빠는 74년 1호 발호를 시작해서 75년 9호까지
그야말로 긴급조치로 국가를 통치해가는 골 때리는 역사가 시작 되었다
(그네아빠 급했던거지 졸라 긴급하게………)
그렇게 긴급조치 9호는 10.26 까정 쭉~ 이어졌다
(노 대통령은 요 거이 지금 써먹으면 어떨까나? )
(씨바! 누군 9번씩이나 써 먹었는데 한번쯤이야 어쩔라구……….)
항간에 우리나라의 빨리빨리는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긴급을 일년에 9번씩이나 강조 하잖어 국민들 한테……
긴급조치 내용이 궁금함 요 아래 가 보셔
고백하지만,
저 암울했던 시절,
나는 아무런 고민과 아픔을 느끼지 못했었다
시위 때문에 휴교조치로 맨 날 방학인 성님들이 부럽기만 할뿐…………
73년 여름 서울로 전학 와서 중,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독재타도를 외치며 자유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그런 일들은
빨갱이들의 짓거리라 생각했었다
좃선일보를 구독했던 우리집,
나는 별로 신문을 보지 않았지만 가끔씩 내 눈에 들어오는 큼지막한
활자들은 시위자들의 불온성을 의심하는 것들 뿐이었다
하여튼
나는 방관자 내지는 시니컬한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그저 통기타에 빠져 공부는 뒷전,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촐랑거리기만 했지
시대의 아픔을 고민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양희은, 송창식, 이장희, 김민기, 김정호,기타등등 통기타가수와
이소룡, 올리비아핫세 제임스딘 알랑드롱 찰슨브론슨. 스티브맥퀸과 같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기 위해 거짓부렁으로 숱하게 어머니의 돈지갑을 열게 했던
한심한 아이였었다
웬 여자?………..
누군지 아는 사람?
참 순박하고 착하게 생겼지?
“ 공. 순. 이 ”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재봉틀을 돌리고
한 개에 5원짜리 풀빵 6개로 세 끼를 때우며 하루 16시간의 중 노동하는 공장에서
졸라 얻어 터져가며 쥐꼬리 만한 월급 모아서
자신들은 학업를 포기해 가며 동생들 훌륭하게 대학공부 시킨 ,
불쌍했던 우리들의 누나이고 22살 꽃다운 나이에
그네아빠 쫄따구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진압경찰의 무차별적 폭력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YH농성사건 김경숙 누나란 말이다
경찰왈
처음에는 “4층에서 떨어지는 것을 경찰이 받았다”
다시 “동맥을 끊은 뒤 투신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
그 뒤 최종적으로 “동맥 절단 뒤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좃까!!
국과수에서 부검결과 투신자살 흔적 없단다
걍 화장해서 의문사 처리해 버렸지
의문사가 한 두건 이라야 그걸 믿지
그냥 경찰이나 검찰, 군에서 “의문사여” 그러면 그것으로 끝./
언론은 뭐허야 ?
X같은 정부가 의문사 존나 남발할 때 니들 기사작성 원칙에 따라
“신속”,”정확” 하게 보도를 해야 할 거 아녀?
그야말로 “의문”자가 들어가면 곧 “왜”라는 의구심을 갖고 파헤쳐서
“정확” 하게를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지 잊어 버리는 거만 “신속”하게 하는 싸가지는 뭐여?
좃선찌라시 사훈이란다
저거 펌 하느라 좃선에 클릭 수 높여 준거 반성한다
내가 사훈하나 만들어 줄게 저거 걍 버려라
“충성! 다카기 마사오’”
“충성!천황폐하
아! 씨바!!
나 존나 반성한다
재수 할 때 가리봉동에서 자취하는 친구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그 동네 집들 이라는게
방,부엌
방,부엌
방,부엌………
이런 식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겨우 비키니 옷장 하나만 들어가면
두 사람 발도 쭉 펴지 못하는 그런 방들이었다
아마 지금 우리집 화장실 보다 작으면 작았지 절대 크지 않을 것이다
그 방세가 아까워 3교대로 한방에서 6명이 자취하는 여공들도 보았다
주간근무자. 야간근무자.아침근무자 이렇게 시간조절해서 ………
정말 새 빠지게 고생하며 번 돈을
남녀가 문란하게 동거하다 인생 조져
결국엔 화류계로 빠져드는 여공이 있는 반면에
알뜰살뜰 모아서 동생 오빠 학비로
고향에 부쳐주는 착한 여공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 당시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그들을
공돌이
공순이라 불으며 천대 시 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은 그네아빠 덕이 아니라
그들의 화려한 청춘을 내다 판 종자돈 덕이
훨씬 더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같이 재수생이었거나 대학생 혹은 몇 년씩 고시촌에 틀어박혀
오직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법전만 외우던 고시생들은
돈 한푼 벌지 못하고 소비만 하던 주제에 그들을 깔보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죽하면
“뽕짝 = 공순이,공돌이”
“팝송,포크송 = 학삐리”
이런 등식도 있었다
명절날 부모 형제에게 전해줄 선물 보따리 양손 가득히 들고 귀향하는 환한 얼굴이
TV에 비추어 질때면
애써 차려 입은듯한 옷차림들이 그때는 왜 그리 촌스럽게만 느껴졌는지………..
나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에고이스트였다
가리봉동 밤 거리를 싸돌아 댕기며 어떻게 한번 재미 좀 볼까 하는
음흉한 생각을 품은 적도 많았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옛날
공순이,
공돌이라 불리웠던
누님,형님 그리고 친구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내 나이 21 때,
YH사건이 기폭제가 되어서 유신체제는 노동자파업,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는 체제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79년, 나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국방의 의무”
그런거 솔직히 없었다
그저 착찹한 기분에 뭐라 말 할수 없는 두려움,
먼저 군대를 가서 첫 휴가 나온 놈들은 왜 그리 똥겁만 주던지…..
우라질놈들…….
“아쉬움~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연기~”
최백호의 “입영전야”는
나를 위해서 작곡된 듯이 79년 10월 그 해
라디오에서 무진장 흘러나왔다
친구들과 졸라 울었다 씨 바!
몇 날 며칠 송별 주에 얼굴이 누렇게 뜬 몸으로 입대해서 3일만에
보충대 대기소에서 10월26일 아침을 맞이 하였다
갑자기 아침에 비상이 걸리고
기간병들이 완전무장에 출동대기를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렇지 않아도 졸라 쫄고 있는 우리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누어 준 지급품을 따블빽에 꾸려서 대기 하란다
우리가 보기에도 기간사병이나 장교 모두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연병장에 태극기는 조기로 올려지고……..
그것을 보고 모두들 의아해 하던 중
우리들 누군가에서 대통령이 죽었다는 말이 퍼져 나왔다
아니 며칠 전 만에도 TV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던 양반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은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것이 곧 전쟁으로 이어질 거라는 불안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조 또! 이제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가 죽었을 때 희망 보다는 불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만큼 그네아빠와 정일이아빠는 서로가 자기의 독재체제가 옳고
어느 한 곳이 불안하고 흔들리면 서로가 서로에게 침략을 당할 것 이라고
국민들에게 구 라를 쳤으니까………
오후에 기간병들이 연병장으로 우리들을 집합시켰다
곧 이어 군용버스와 트럭이 들어오고 기간병들의 지휘 아래 버스에 옮겨 타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기간병들이 한마디씩 던진다
“니 덜 좃 됐다”
“전쟁 나면 총알받이다”
씨댕이덜!
그 말을 우리는 믿었걸랑
우리들을 싣은 버스가 보충대를 빠져 나와 시가지를 지날 때 한 동료가
수첩을 찢어 몇 자 끄적끄적 하더니 차창 밖으로 휙 던졌다
그것을 보고 따라 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버스 안 분위기는
침울하다 못해 엄숙함에 비장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구석에서 소리없이 흐느끼며 눈물 흐리는 동료를 보자
나는 불현듯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쌍한 우리엄마
고2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세가 기울어
몇 년을 힘겹게 살아 오시며 고생하셨는데
대학포기하고 군대 가겠다는 나의 말에 무척이도 우시던 모습이 떠올라
미치도록 엄마가 그리워졌다
우리를 싣은 버스는 목적지도 가르쳐주지 않은체
38교를 지나 북으로 북으로 자꾸만 가고 있었다
쓰다 보니 글에 자꾸만 군더더기기 붙어서 졸라 길어졌다
누구처럼 핵심 뽀인트를 요약해서 글을 쓸 줄 아는 문장력이 딸리기 때문이다
오타나 어색한 문장이 있어도 걍 넘어가는 너그러움을…….
좃선찌라시와 나와의 관계는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이거이 연 이틀에 걸쳐 12시간 넘게 작업한 것이다
허접한 글 읽느라 졸라 고생시켜 지송스럽고 부끄럽다
그래도 좃선찌라시가 사라지는 그날까정 우리 힘 좀 내자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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