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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짐 푸는 중

가오다시

2009-02-22 23: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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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에 연재되는 [남희석 아무거나-진정한 행복 지수는 자식에서 판가름 난다?] 란 글을 보았다. 중년 아버지의 진정한 ‘가오’ (체면)에 대한 재미난 글이었지만 왠지 나는 이 시대 아버지들의 씁쓸한 자화상을 보는 것만 같아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남희석의 아무거나] 진정한 행복 지수는 자식에서 판가름 난다?

 

얼마 전. 나름 이 나라의 기둥 겁나게 튼튼한 회사의 중역들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50세쯤 되어 보이는 분들이었고 은근슬쩍 목에 힘이 빡 들어가 있었으며 말투에도 역시 자부심이 빡 들어 있었다.

 

술도 21년 묵은 것과 30년 묵은 것을 마시고 있었다. 이쯤 되면 얼마나 잘난 분들이신지 대강 알아 차리셨으리라. 난 이곳에 모든 글을 전원 실명을 원칙으로 하는데 그랬다간 왠지 누군가에게 끌려 갈 것 같아서리^^;;. 이번 만큼은 좀 봐 주시기 바란다.

 

한창 술을 마시다 내가 선약이 있어 가야 한다고 하자 다들 그분을 이리로 모시고 오라는 거다. 그러면서도 누구냐. 뭐하는 사람이냐. 간을 본다. 다름 아닌 개그맨 선배 이하원 형님이시다.

 

설명을 드렸다. 그러자 한명은 “아~옛날에 저 그...”였고 나머지는 무관심하다는 표정. 암튼 그 어색한 자리에 건방지게 한참 후배가 대선배를 모시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선배가 오셔서 인사하는 가운데도 다들 빡빡한 눈빛과 중역으로서의 ‘가오다시(원래 쓰면 안 되는 말이지만 이런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는 이보다 적절한 말이 없는 것 같다. 한번만 봐 주시기 바란다)’를 한껏 뽐내시는 것이다. 그러다 자기들끼리의 대화.

 

 

나는 이 상황을 어찌 뚫을까 고민…. 난데없는 내 입에서 나온 말. “이하원 선배님 아들이 이번에 민족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올 스톱…. 조용…. 그러다 한분이 말한다. “민사고요?” 이하원: “네”. 일동: “축하드립니다!” “아니 얼마나 똑똑하기에” “아! 맞다 이선생님도 영어 잘하시고 지적이신 분이시지요!!!” “제 술 한잔 받으세요! 내 아들 놈은 공부 정말 안 해요!!”

 

그 이후 나는 대화에 끼지 못 했을 뿐이고…. 평소 술 안 드시던 하원 형님은 폭탄 계속 마실 뿐이고…. 거만한 갑을 관계의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고…. 난 그 날 처음으로 알았다. 세상의 인간 위아래 순위가 어찌 정해지는지 말이다. 자기 직업. 연봉. 자동차 사이즈. 200수짜리 양복은 눈에 보이는 간판일 뿐이고, 진정한 행복 지수와 '가오'는 자식에서 판가름 난다는 것을. 그리고 이게 여성들 동창회에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하원 형님은 사업을 열심히 하고 계신다. 아내는 탤런트 권재희씨다. 이것저것 다 필요없이 네이버 검색어 1위에 어느 날 떠 있었다.

 

‘이하원 아들’

 

우리 예쁜 딸 보령이. 어제 받아쓰기 30점 받아왔다.^^

둘째 하령이는 민사고 보내려고 파스퇴르 분유만 먹이고 있다.

  출처-http://isplus.joins.com/enter/star/200902/20/200902201033398106020100000201040002010401.html

 

얼마 전, 올해 고3이 되는 큰아들이 밥 먹다 말고 제법 진지한 얼굴로 갑자기 땡땡이를 쳐보고 싶다고 말을 했다. 공부는 썩 잘하진 못하지만 중학교 3년 개근에 고등학교에 올라 와서도 그간 결석 한번이 없는 범탱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잠시 얼떨떨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고뇌가 찐하게 전해져서인지 아버지임내 섣부른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었다.

 

 

녀석도 지칠 만도 할 것이다. 3년 내내 방학도 없이 보충수업을 받아야만 하는 치열한 입시전쟁. 녀석은 그 전장에 충분한 보급품도 받지 못하며 홀로 외로이 선 학도병인 것만 같았다. 갑자기 마음이 짠해지고 그 짠함이 안개비처럼 고스란히 내려 앉아 내 두 어깨를 적셨다.

 

 

어디로 도망칠래? 이미 대한민국은 사방이 전쟁터인데......

숨을 곳도 없고 등을 보이면 넌 바로 죽어......

이를 어쩌니? 

 

 

나는 녀석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질 못했다. 지금도 내 추억 속에 선명한 시리도록 아픈 땡땡이 무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부끄럽게도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거의 날라리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나쁜 짓을 일삼는 양아치였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공부가 싫어 통기타에, 영화에, 친구들과 어울려 사방팔방 싸돌아다니느라 땡땡이를 밥 먹듯 쳤었다. 주로 영화를 보러가느라 그랬던 것 같다.

 

한마디로 나의 고교시절은 영화 <헐리우드키드의 생애>와 <말죽거리 잔혹사>가 동시 상영된 ‘짬짜면‘ 이라고나 할까?

 

그런 허투루 학교생활에서도 그나마 정학이나 퇴학이 없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만큼 나는 ‘범탱이’와 ‘날라리’ 사이에서 방황을 하던 경계인이었다. 마치 영화 <25시>의 요한처럼 말이다.

 

그런 과거가 떠올라 나는 아들 녀석에게 아무 말 않고 밥만 먹었다. 그리고 녀석은 그 다음날 나의 묵인 하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녀석의 소원대로 땡땡이를 쳤던 것이다. 녀석은 그날 컴퓨터게임에, TV시청에,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비겁하게 또 울화가 치밀었지만 역시 아무 말 못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얌마!  너 '고삼'야 마!!   미쳤어?

 

내 '가오다시’는 뭘로 세워야 할까?

나도 '가오다시'를 잡고 잡다.

 

하지만 작은 녀석도 일반고교에 진학을 한 상태니 ‘민사고‘는 이미 물 건너갔다.

제기럴!

내일 당장 서울우유나 신청해야겠다.

 

그리고 맘팅아!

언제 기차 타는 일 있거덜랑

홍익매점에서 호두과자나 사오게나

큰아들 주게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