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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짐 푸는 중

<워낭소리>는 그래도 정말 나빴다.

이 글을 먼저 읽으셔야 합니다.
https://malasu.tistory.com/m/110

<워낭소리>를 보면서 두려움에 떨어야했습니다.

2009-03-12 들어가면서..... 이글이 어쩌면 생존해 계시는의 최원균 할아버지님께 폐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글은 누가 틀리고 맞음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최원균 할아버지와 동시대

malasu.tistory.com

 

2009-03-14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었나요?
영화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시기가 나빴다는 뜻입니다.
오해푸시고 차분히 글을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입견이 들어가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곡해가 되거든요^^ 

 먼저 이글을 읽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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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저께 베스트에 간 “<워낭소리>를 보면서 두려움에 떨어야했습니다” (←보기)의 글에 어떤분이 반론(?)을 주셨더군요.  이미 읽으신 분은 패스하십시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누군가는 감동을, 아무개는 공포를, 어떤이는 아무런 느낌도 얻지 못한다. 어디 영화 뿐이겠냐만 세상일이란게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으니 누구의 시각이 정답이냐?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래도 뭐 할말은 하고 살아야지!라는 입장에서 "워낭소리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비판?을 좀 해 볼까 한다.

왜냐하면 "워낭소리에 대한 비판들" 중에는 영화의 본질적인 측면과 무관한 것들이 이야기 되기 때문이다. 그 중 단연 탑은 "할아버지의 소에대한 무자비함"이라는 잣대다. 평생 개처럼? 일해서 9남매를 키운 소에게, 그것도 이제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늙고 초라한 소에게, 보상은 커녕 죽어라 일만 시키는 할아버지의 잔인함에 치를 떤다는 비평, 일견 타당해 보이는 그 시각에, 나는 그야말로 치를 떤다.

할아버지는 어느 새 부도덕한 자본가나 권력자가 되어 힘없는 노동자나 국민을 착취 내지는 이용해 먹는다. 아니 골수까지 빼먹는 야차가 되었다. 정말 그런가?

할아버지의 비인간적이고 잔인함이 에쑤비에쑤 sos프로그램에 제보되어 전국민적 공분을 사고 불쌍한 우리의 소는 가축복지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해피엔딩한 결말을 맺어야만 하나.(할아버지는 심지어 이명박 정권과 결부도 된다 허거걱!)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영화는 명바기가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기획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이 땅의 아버지들은 듣보잡 IMF라는 것을 맞이 하여 회사로부터 강제퇴직 당하고 가정으로부터 무능력한 가장으로 낙인 찍히고....노숙으로 자살로....암턴 말하기 조차 힘겨운 무수한 아픔과 상처가 아버지들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사회는 어머니의 희생은 예나지금이나 숭고하게 쳐주지만 아버지에 관해선 말이 없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는 소외된 아버지들에 대해 대변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영화의 알파요 오메가 되겠다.

아버지, 우직함, 말없음, 고된 노동, 희생, 소, 초라함, 낡음 , 고집불통...

위에 열거된 단어들은 영화속에선 같은 의미를 가진 낱말들이다(물론 내 갠적인 생각이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일반적으로 단점이 많다.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고 대화가 잘 안통하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의 노고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어떤 고통이나 아픔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는 했나? 묵묵히 가족을 위해 일하는 그 문제 많은 아버지들한테 한번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말 좀 해달라는게 감독이다. 그리고 그걸 영화적으로 표현하는데 수단으로써 일하는 소가 등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향에서 밭가는 소와 아버지가 너무 닮았으니까. 이게 촛점이다.

왜 할아버지는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으로 보였나?

좀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내 대답은 "편집 때문이다" 이다. 여기에 관객들이 자기 시각대로만 보는 것에 결부되어서다. 좀더 보태면 "농삿일"에 대한 무지 정도랄까. 우선 이 영화를 찍은 기간이 3년으로 알고 있다. 그 중 그림이 되는 것과 의도했던 메시지를 표현하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림 등등해서 편집된게 그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만 보면 소가 계속 일만 하는 노예처럼 보인다. 또 할아버지는 일에 중독된 것처럼 보인다. 소나 할아버지나 24시간 내내 일하지도 못하고 일년 내내 일하지도 못한다. 봄에서 가을까지 일 할 수 있는 날만 하고 겨울은 농한기라 일이 없다. 충분히 휴식할 수 있다.

그 얘기가 아니잖어 왜 관절염 걸린 소를 일시키냐? 엄연히 폭력이고 학대 아니냐?라는 비난이 귓구녕에 꽂힌다. 그들에게 묻는다. 일하는 소가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하면 늘어나는 몸무게로 인해 관절이 더 절딴나고 병에 쉽게 걸리게 된다. 그럼 계속 부려 먹어야 겠냐? 그런 말이 아니라  할아버지나 소나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움직였고 일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한 거다. 할아버지와 소가 일한 양이 무지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의 농사는 시골에서 농사라 칭하기엔 좀 부족하다 싶다. 그런데 관객들은 자기 시선으로만 보려고 한다(영화의 한계니까 뭐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쓰다보니 졸라 길어지네 ㅜㅜ

자식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 효도 하지 않는다? 개뿔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시골 떠나 도시 자식들한테 가면 거의 병난다. 육체든 마음이든 말이다. 아들놈 며느리 눈치(무지 본다)봐야지 손주놈들한테 무시당하지 공기 나쁘지 시골 친구들 보고 싶지....늘 일하다가 일이 없이 있으니까 늘어나는 이 몸무게요 쌓이는 이 근심걱정이라. 자식들은 "이제 농삿일 안하니께 편안하지요?" 이런 철없는 소리나 하고 자빠졌고 심심하면 경노당에 가서 놀으세요라는 걸 무슨 배려로 안다. 에라이....

시골에서 사셨던 분들은 그 분들이 사셨던 방식대로 사시면 된다. 좀더 자주 전화드리고 찾아뵙고 농삿일 거들어 드리고 그러면 된다. 농사짓고 사는 분들한테 일중독이란 표현도 좀 그렇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는 분들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하나? 무슨 수로? 농사란 건 그냥 농사가 아니라 땅과 하늘과 바람등과 교감하는 것이다. 농부는 자연과 하나가 될 수 밖에 없고....영화속에서 농약을 안치는 할아버지는 욕심꾸러기가 아니다. 더 많이 얻기 위해 꼼수를 쓰지 않는다. 경운기도 쓰지 않는다. 환경오염과 환경운동..이런 거 몰라도 자연스럽게 환경정의를 실천하고 계시지 않는가!

평균적으로 사는 소들에 비해 무려 2배나 더 산 소는 학대받았다면 아마도 일찍 죽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소를 얼마나 끔찍히 사랑했으면 그렇게 됐겠나. 시골 우리집도 두마리 소를 길렀다. 그 중 일하는 소를 부모님이 유난히 아끼셨는데 영화속 할아버지 만큼은 아니었다. 농부에게 있어 소란 정말 내 새끼와 진배 없다. 다만 영화가 그 부분을 등한시?했다고 할 수 밖에.

막 죽어가는 순간에서야 고뚜레를 제거했다. 좀더 일찍 제거해야 하지 않았냐? 할아버지가 소의 죽음을 예측했을까? 수의사는 수명이 다 되었다고 판단했지만 할아버지는 소가 좀더 오래 살 것이라고 믿었다고 보는게 옳다. 그럴리가 없다 이놈이 얼마나 건강한데....보통 다른 농부였으면 고기값 되었을 때 팔아치웠을 거다. 왜냐면 그게 이익이니까. 아마 한걸음도 걷지 못했다 해도 할아버지는 계속 건강식 먹이 주면서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소가 마지막 죽을 때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게 아니라 그럴 에너지가 없는 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어떤인물이 죽을 때 대개 눈을 뜨고 죽는다. 그러면 다른 배우가 시신의 이마쪽에서 턱방향으로 손바닥을 사용해서 눈을 감겨 준다. 그것은 죽은 이가 눈꺼풀을 내릴 에너지 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 관객들에게 보여진 소와 할아버지 눈에 비친 소는 다른 것 같다. 할아버지 눈에 비친 소의 죽음은 , 달리 말하면 자식의 죽음이요 가족의 죽음이요 동료의 죽음이다. 소의 죽음에 관한한 할아버지가 제일 슬프다. 자기와 동일시 되었던 소가 죽었으니까. 영화 첫 장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절에 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죽은 소가 그립지 않냐 보고싶지 않냐는 질문을 한다. 할아버지는 보고싶고 그립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기도속에서 저승의 어딘가에서 이승으로 들려오는 워낭소리를 들었을 것 같다. 좋은 곳에 갔을 거야 좋은 곳에....

소와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산다. 또 시골에서 산다는 의미는 노동을 많이 해야 유지가 되는 삶이다. 군불을 때야 하고 그럴려면 나무를 해와야 하고 농사를 지으려면 소에 의지 해야하고 그 소와 정들면 떨어지기 힘들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몸이 못견딘다. 처한 상황에 맞게 그들의 역량대로 사는 것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움직였고 일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했다는 것이다. 이게 농촌 삶이다. 또 자식들이 왜 안 모시냐 하는데 그것보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당신들의 힘대로 사시고 싶은 거다. 자식들한테 기대기 싫고...소는 죽었지만 할아버지는 다른 소를 길들여 여전히 농사 짓고 사신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멋지고 존경스럽다. 할아버지 일을 쉬엄쉬엄 하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영화는 영화다.

설령 그게 다큐영화라 하더라도.
할아버지와 자식들의 불효? 그리고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논리는 이영화의 본질(메시지)과 그야말로 천리만리 떨어진 것이라고 본다. 영화가 표현하려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보다 자신의 평소 생각을 영화에 지나치게 투영한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유명했던 광고 노래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우스개 소리로 이 노래를 들으면 아버지들은 미친다고들 했다. 지쳐서 죽고 싶은데 귀여운 얼굴로 엄마와 새끼들이 저 노래를 합창해 대면 속으로 "나보고 지금 죽으라는 소린가" 하면서 말이다. 영화속 할아버지가 잔인하다는 시각이 가능하다면 아빠힘내세요를 부르는 아내와 자식들 또한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졸지에 아내와 자식들이 뱀파이어가 되어 아버지 피를 빨아 먹는 군화하하하핫~^^

그저 또다른 시각으로 봐 주시길 바랍니다.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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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먼저 “<워낭소리>를 보면서 두려움에 떨어야했습니다“ 가 이렇게 관심을 받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Daum 블로거뉴스 베스트에 오르자 무려 8,750여명이라는 방문객기록도 세우고 오랜만에 기라성 같은 논객의 강호인 섶대문에 등극하는 영광도 누렸네요. 그거이 머 제가 글을 잘 썼다기보다는 아마도 나의 신묘한 삐끼가 통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흐뭇합니다. 삐끼도 실력이거든요^^

시기가 나빴다

지금의 동물적 호사스런 먹거리와 볼거리로 인해, 우리 한민족 원래의 성정(性情)과 체형까지도 바뀐 오늘날의 초현대 서구화된 대한민국은, 과거엔 남새와 알알곡식으로 비록 끼니는 때웠을망정, 그래도 자연을 닮아 넉넉한 인정을 품은 벼농사 중심의 농경국가였습니다.

농경국가는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절기(節氣)에 따라 농사를 짓는 자연과 일체된 산업국가라 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지금처럼 계절 구분 없이 365일24시간 아무 때라도 일 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일하고 쉬었습니다.

물론, 농한기에 길쌈을 매거나 새끼를 꼬는 등 잡일은 많았지만 그래도 민속놀이가 농한기에 특히 많이 발전해온 것만 보아도, 우리조상은 분명 재충전하는‘휴식의 지혜'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박정희정권의 개발도상산업국가를 시작으로( 실은 이미 이승만 정권 때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었다고 함) 오늘날 다양한 직업에 통상국가로 오기까지, 우리는 개미같이 참으로 열심히 열심히 또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통계로도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뭐 그 덕에 오늘날 이런 대한민국이 있으니 닥치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아무튼, 대한민국 정부는 근검절약→조국근대화→수출100억불 달성→국민소득2만 불→3만 불 이렇게 당근과 채찍질로 우리네를 몰고 가고 또 그 재촉 질에 우리는 ’빨리빨리’를 서로서로 외치며 마치 쫓기듯 허둥지둥 바삐만 살았습니다.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 ‘잘살아 보세’ 정부계몽시대를 살아오면서 바로 그만 우리는 절기(節氣)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놀이를 잃어버리고 자연이 알아서 제때에 제공하는 소중한 휴식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차! 하고 있는 모양새가 지금입니다. 그 계기가 된 원인은 많지만 그 중하나가 불확실한 미래를 눈치 챘기 때문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니, 그래도 우리부모님 세대에는 똑똑한 만큼, 노력한 만큼, 투자한 만큼, 희망이 현실로 변하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또 믿고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형설지공' '주경야독'‘공든 탑이 무너지랴’가‘개천에서 용 났다’와 같은 해피엔딩으로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는 말입죠. 정부도 일정부분 그렇게 소화를 해주었고요.

하지만 요즘은‘가진 만큼'‘뻔뻔한 만큼'‘포악한 만큼' '비겁한 만큼' 대박을 이루어내는 참담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단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뒤돌아보고 잠시 쉬어가며 생각 좀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워낭소리>가 벌컥 울리더란 말입죠.

“봐라! 우리네 아버지는 저렇게 불편한 몸으로 한평생을 너희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시방 쉬고 싶다고?” 이렇게 혼 내키는 것 같더란 말입죠.

만약 <워낭소리>가 경제위기, 입시지옥, 구직난, 도덕상실이 없는 그래도 좋은 시간에 울렸더라면 당연히 뒤돌아 보일 사람은 우리네‘아버지’일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보며 반성하며 다시 힘을 냈을 텐데 말이죠.

그리고 뭐 이명박대통령이 의도적이었던 아니던 간에 저도<워낭소리>를 정치와 애써 얽기는 싫습니다. 하지만 우연이 시기를 나쁘게 했다고 말하고는 싶습니다.

자연을 닮은 사람과 사회

사람도 자연의 일부분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을 해도 인간은 자연에 기대어 사는 아주 작은 존재들이란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의 ‘자연을 보호하자’ 란 캐치프레이즈처럼 언듯 자연은 할 수만 있다면 정복의 대상이라는 교만한 마음이 우리를 포악하게 만드는 자연스럽지 못한 어리석음입니다. 그 어리석음으로 자연의 이치를 절대로 거스를 수가 없다는 것은 앞으로도 시간이 계속 증명하고 심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연의 이치를 관찰하고 통계화한 동양의 음양오행설은 서양과학과 달리 자연에 도전하지 않고 자연의 수리영역 안에서 발달되어온 과학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도올-“음양오행설은 아직은 과학이 아니나 인류의 축적된 지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음양오행의 과학성은 이제부터 엄밀한 논리에 의하여 차곡차곡 입증되어 나갈 것이다“)

그런 가정(假定) 하에 사람의 일생을 자연의 계절로 비유하자면 최 할아버님의 계절은 아주 늦은 가을에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가을은 풍년이든 아니든 일단 자연이 준 곡식을 고맙게 거두고 나서 쉬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도 자연의 일부분인 몸의 절기에 거스르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말하며 정신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하는 것이 숭고한 인간이라는 도덕주의계몽에 빠져서 최원균 할아버님만이 가지는 인과성(因果性)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솔직히 저는 노는 게 좋습니다. 또 논다 하니 이상한 눈초리로 보지 마시고요.......

형편과 여건이 허락하고 상식적인 범위 내에서 나의 원초적 본능의 끼를 자연스럽게 즐기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안의 자유스러움을 결코 비도덕적이라 매도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나의 자연스러움은 나의 아내와 자식과 어머니란 가족울타리치기에 쫓겨 미뤄지다 끝내 이제는 좌절하고 있고  나는 그것 또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조절됨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반항하거나 일탈하지 않고 순응하고 있다는 거죠. 

나는 이런데 우리 최원균 할아버님은 어떨까요?

여기서 우리는 여건상 또 가정(假定)으로 얘기를 풀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할아버님의 생과 삶의 인과(因果)를 단지 78분의 <워낭소리>로 재단한다는 것은 턱없는 짓이고 또 제 글에 반론을 주신 “워낭소리”님의 말대로 영화의 많은 부분이 편집되어 할아버님의 진짜일상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최원균 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불구의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몸을 다스리는 정신은 불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이 지금껏 9남매를 꿋꿋이 키워온 할아버님의 원동력이었을 겁니다.

“세상아 봐라! 난 일한다. 날 곁눈질로 보지마라. 동정하지도 말고 편견도 갖지 말라. 단지 나는 느릴 뿐이다. 그러나 쉬지 않는다.”

저 꼿꼿함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몸을 거부하면서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의사의 진단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자연에 도전하는 서양과학과 자연에 순응하는 동양과학 모두 할아버님 제발 쉬시라 말을 하는데 아는 것은 오로지 일뿐이라 놓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할아버님을 바라보면서 지난날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 애잔한 카타르시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죠.

할아버님은 왜 세상에 저렇게 말을 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닌 틀림을 더 강조하는 우리네 심성의 탓도 있겠지만, 복지와 노후보장정책은 뒷전이고 독재개발정책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책임은 없는 걸까요? 

이제는 바꿔야 합니다.“잘 살아 보세!“란 가치를 최우선에 두고 고단한 경주를 한 긴 시간. 이제 이만큼 희생하고 또 이루어냈으면 쉬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가 진짜 자연을 닮은 자연스러운 사회입니다.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최할아버님도 분명 우리들의 아버지이지만 낙오되어 뒤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아버지도 우리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설령 일을 무서워하고 피해도 그것은 결코 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님이 저렇게 일을 하셨기에 그래도 오래 사셨다는 분...........

아니요.

그렇지 않으신 분들도 오래오래 아주 잘 사십니다. 비록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아들딸, 손자, 며느리 효도 받으시며 매일매일 경로당에서 10원짜리 화투로 날낮(?) 까시고 뒤늦은 설레임에 불순한(?) 홍조를 감추느라 전전긍긍하시는 우리들의 귀여운 막가파 할아버지 할머님들 아주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설령 젊었을 때 자식들에게 변변치 못한 아버지였을지언정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하는 가정과 사회기반을 어서 빨리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네가 ‘노동의 가치‘를 아냐?” 고 반문하시는 분.......

네.

저도 일 년 365일 국경일, 명절, 공휴일 할 것 없이 하루 10시간 이상은 지금 노동하고 있습니다.(일 년에 7~8일 정도 놀음) 논 갈고 밭가는 농사일만이 노동은 아니지요. 30대에는 노가다에 별별 노동도 다해봤습니다. 그래서 땀 흘린 뒤 먹는 막걸리의 진한 맛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죠. 그런 노동도 결국은 삶의 릴렉스를 위한 근육의 긴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긴장과 이완이 생명의 근간이란 말입죠.

맺음

자연을 닮아 조화로움이 있고 사람들을 경악시키는 버블도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방법은? 절기를 되찾고 자연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겨울철에 하우스딸기를 즐기고 여름철에 냉방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절제하지 못하는 이 호사와 욕심이 결국 우리네 고운 심성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워낭소리>는 느림의 미학이라 하더군요. 한때는 초고속이 트랜드고 앞서가는 문명이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것은 자연과 점점 멀어지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인생무상!

하지만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자연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최원균 할아버님은 성공하신분입니다. 9남매를 모두 훌륭히 키우셨고 그 연세에 자식에게 기대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삶은 만들어 가시니까요. 하지만 할아버님! 이제는 조금 일을 줄이시고 좀 더 많이 할머님의 손을 잡아드리세요. 이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자연스럽게 닮으신 분은 바로 할머님 한 분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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