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연기에 너무 몰입했던 배우는 한동안 그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해 PTSD를 겪는다고 한다. 한강 작가가<소년이 온다>를 완성한 후 겪었을 감정의 무게를 생각해 본다. 200여 쪽에 불과한 활자로만 경험한 나도 후유증이 이럴진데 그 참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짠한 마음과 고마움이 뒤섞인다.
소설을 읽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중간 중간 통곡에 가까운 눈물 멈추기 위해 책을 덮기도 하였다. 나는 내가 흘린 그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다. 직접 경험한 것도, 그 지역 출신도 아니고, 주위에 친척이나 지인이 희생된 일도 없다. 요즘 드라마 보며 부쩍 눈물이 많아진 여성 호르몬 탓도 아니었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꾹꾹 눌렀던 울음이, 화장터 수레에 엄마를 올려 놓고 마지막으로 작별을 할 때 터져 나왔던 통곡과 같은, 못난 자식을 끝까지 사랑해주신 엄마에 대한 '죄책감' 과 같은 것이었고 야만의 동시대를 같이 겪었으면서도 그들에게 무심했던 산자의 '죄책감'. 바로 그것이었다.
겨우 중학생인 동호가 나이를 속여가며, 도청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건물 옥상 저격병 총에 피흘리는 친구 정대의 손을 놓고 허겁지겁 목숨을 건진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누나를 찾으러 갔다 총 맞아 죽어야만 했던 정대 역시,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자신을 뒷바라지한 누나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은숙 역시, 책 번역자의 행방을 추궁하며 날아오던 검열관의 무지막지한 일곱대의 뺨을 맞고도 절대 울지 않았다. 검열에 의해 삭제된 대사를 마임처럼 입모양으로 전달하는 연극을 보다가 어린 소년의 등장에 울었다. 그리고 동호를 사지에 두고 혼자 빠져 나온 '죄책감' 때문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고름같은 눈물"을 닦지 않았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책속에 살아 남은 주인공들은 죄책감과 무력감에 짖눌린 자책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누구는 살아있음이 불편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그리고 죄책감
1979년 10월 23일. 박정희가 김재규 총에 맞아 죽기 사흘 전, 나는 의정부 101보충대에 입소했다. 10월 27일 아침. 기간병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모두들 단독군장에 굳은 얼굴로 바삐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허둥대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즈음, 연병장에 조기가 올라갔다.
우린 그 영문을 몰랐다. 기간병들은 일체 함구했다. 그날은 오후에 보급품을 가득 담은 더블백과 함께 미리 배치된 부대로 이송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예정보다 이른 점심 전, 연병장에 관광버스와 육공트럭이 줄을 이으며 들이 닥쳤다. 그리고 기간병들이 서둘러 우리를 연병장에 집합시키고 부대 이름을 단 관광버스와 육공트럭 앞에 우리를 나누어 정렬 시켰다.
갑자기 맨 앞줄에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 수군댐이 내 바로 앞줄에 왔을 때야 나는 비로소 박정희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소스라치게 무서워지고 전쟁의 공포가 엄습해 왔다. 그때 얼굴이 뽀얀 멀대처럼 생긴 행정 기간병이 나즈막히 흉사를 내뱉었다. " 너네들 이제 다 죽었다. 방아쇠 당기는 것만 배우면 전방으로 보내질 거다" 가지런한 하얀 이가 야비하게 빛났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의정부 시내를 지나 한없이 올라가다 3.8교를 넘어가며 버스안에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즈막한 흐느낌도 들려왔다. 나 역시 무서움에 바르르 떨었다.
사단훈련소에서는 비상계엄 사태로 더블백을 풀지 않은 채 훈련을 받았다. 방아쇠 당기는 법 뿐만 아니라, 모든 군사기초훈련을 정상적으로 다 받았다. 멀대 말이 사실이 아니라 참 다행이었다. 5주 훈련을 마치고 나는 산골깊숙한 대대로 배치받았다. 그날 밤 내무반에서는 더블백 검사와 군장꾸리기 훈련을 반복하며 얼차려와 함께 야전삽으로 엉덩이를 수차례 맞아야만 했다. 상병은 그 짓을 즐기는 것 같았다.
김상병. 인상도 성질도 더러운 경상도 사내였다. 훈련소 화장실 변기 뚜껑 나무에 찔려 곪았던 엉덩이 상처가 마침내 터졌다. 광목팬티를 젖시고 군복 바지로 배여 나온 피를 보고 놀란 말년 병장의 제지로, 나의 길고긴 고달픈 신고식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칠흙같이 깜깜한 밤, 막사옆 계곡 얼음을 깨고 피 묻은 광목팬티를 빨면서, 서러움에 북받쳐 흘리던 그 눈물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80년 5월은 시도때도 없이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군화를 신은채 취침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김상병이 저주에 찬 악다구니가 있었다.
" 이 전라도 깽깽이 새끼들 왜 데모질 하고 자빠졌노...싸그리 다 죽여야 한데이"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일정 부분 그 악다구니에 동조도 했던 것 같다. 비상에 의한 졸병 심신이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그해 여름 나는 신참 한 명을 받았다. 전라도 군번이었다. 대학생이었다. 저녁 식사 후 식판 설겆이에 배제되어 일찍히 혼자 내무반 귀퉁이에 부동자세를 하고 앉아 있던 그에게 김 상병이 이쑤시개질 하며 물었다.
" 니 데모하다 붙잡혀 들어왔제?"
신병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래서 일찍 시작됐다. 신고식이....
나보다 더한 신고식이었다. 마치 분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김 상병은 정훈교육시간엔 똘망똘망한 모범생이었기에 전라도 군번 신병은 교육에서 심어진 편견의 희생양이었다.
80년 전두환이 정국을 장악하고 군대 정훈 교육의 목표는, 12.12신군부를 정당화 하고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남파 간첩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훈 교훈시간에 우리에게 대적관을 심어주고 시위진압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광주 시민들을 적대시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폭력의 정당성 주장에 서서히 동조하게 되었다.
신병 조이병은 고도 근시인지 원시인지 두꺼운 안경을 썼다. 행동도 굼떴고 고문관 스타일이었다. 그로 인해 야간 집합이 잦아졌다. 김상병은 신고식 이후로는 조이병을 구타하지 않았다. 대신 조이병을 세워 놓고 우리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빳다나 얼차레를 주었다. 그럴 때 마다 조이병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두꺼운 안경 탓에 큰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얼차례를 받으며 속으로 조이병을 욕했다. 그리고 의문도 가졌다.
"저 정도 시력으로 여긴 왜? 와 가지고..."
집합이 끝나면 다음은 나보다 선임인 박일병의 갈굼이 시작되었다. 나야 같은 일병이라 서있으면 되지만 내 밑으로 이등병들 특히 조이병은 폭언과 구타와 얼차례를 한 동안 받고 나서야 취침에 들었다.
소대원들의 출신지를 보면 이상하게 전라도 출신이 거의 없었다. 있어도 하급들이라 별 힘을 못썼기에 조이병은 거의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소대내에서 묘한 배척과 고립감에 짖눌린채 무언의 규율 속에서 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나한테는 조금은 살갑게 다가왔지만 나는 선뜻 받아주지 않았다. 김상병의 눈치를 봤던 것이다.
그러다 찬바람이 쎄지고 서리가 내릴 즈음, 나는 연대 본부중대로 전출 명을 받았다. 적막강산과 같은 산골짝 대대를 벗어나는 것도 좋았지만 늦은 밤 김상병의 집합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좋았다. 그 뒤로 조이병에 관한 나중에 들은 소식은 내가 전출되고 얼마 후 그는 새벽 초소 근무를 서다, 무기고 옆 창고 슬라브에 삐져 나온 철근에 목을 걸었다 한다. 그러나 다행이 일찍 발견이 되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소식을 끝으로 나는 그의 소식을 지금 것 듣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제대를 하고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날, 난 어떤 소문을 들었다. 1980년 초반 전두환 신군부는 전라도출신을 차별적 대우를 하여 어지간하면 현역 입대 판정을 하고 그들을 우선적으로 최전방부대로 배치했다는 소문이었다. 그제서야 부대내 전라도 출신이 없었던 이유와 눈이 많이 나빴음에도 현역으로 입대한 조이병에게 든 의문이 해결되었다.
아마, 그 시기에 '5.18 광주사태' 에 관한 진실도 알았을 것이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혹한 사진과 함께 진실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엄청 컸다. 그리고 나는 '5.18 광주사태' 가 아니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조이병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묻어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 여름 추워하던 그에게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나의 부끄러운 용기와, 외면했던 그의 고통이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또 죄책감
저 물건은 '국난극복기장' 이란 물건이다.일종의 훈장이다. 전두환은 12.12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에 1980년 전후를 '국난 기간'으로 규정, 이 시기에 복무한 군인,군무원,공무원, 그리고 주한 외국군인들에게 저 기장을 수여했다.말하자면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것에 대한 공로의 댓가였다.
나는 제대하면서 받은 저 요망한 물건을 한동안 자랑스럽게 고히 간직하고 사람들에게 자랑도 했었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 한참동안을 말이다.
그리고 또 또 죄책감들
부끄러운 고백을 더 하자면, 나는 70년대 박정희를 김일성과 맞서 싸우는 위대한 통치자로 알았다. 문세광 흉탄에 육영숙 여사를 잃은 아픔도 함께 느껴졌고 그의 가족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줄만 알았다. 박정희가 아니면 적화통일이 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샛별보기 운동이나 하는 줄만 알았기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공포심에 떨었던 거였다.
군대에서 보고 들은 전두환은, 고정 간첩들로 인해 혼란에 빠진 후방 사회를 수습하는 영웅인줄 알았다. 전역 후에도 8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 대학생들의 극렬한 투쟁을 치기 어린 철없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광주는 나에게 사태였다. 전라도 출신은 사기꾼이 많았고 뒷통수 잘치는 유전자를 가진 종족쯤으로 알았다. 내 주위 대부분은 사람들이 거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 전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전라도는 동토였고 광주는 게토였다.
내가 한참 푸르렀던 청춘일 때, 남쪽의 전라도는 머나먼 섬이었다. 2006년인가 즈음, 어느 단체와 망월동 국립묘지를 참배하러 갈 때까지 나는, 전라도 지역을 한번도 방문하거나 지나치지도 않았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쪽에 연고도 없었고 관광하기에도 교통편이 수월치 않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책을 읽으며 그 많은 시간 무지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과 전두환이 천수를 누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지옥불에 떨어져야 마땅한 극악무도한 일베들의 망발에도 속수무책으로 느낀 무력감에 죄책감을 느꼈고 ,오늘까지 '오쉿팔'을 무방비로 또 들어야 하는 나의 느슨해진 마음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년이 온다>를 이제서야 읽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온몸을 휘감아 나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그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앞서 가신
그 님들의 선혈로 젖은 이 처연한 대지위에
윤석열 무속 정권이 성을 쌓아 올리고 있다.
산 자여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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