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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짐 푸는 중

오염된 언론:언론이 바로 서야 민주주의가 산다

2022-02-8

선거철의 갑론을박

선거철이라 여기저기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나도 내 생각과 주장을 '입' 있어 말하고 '손' 있어 옮겨 보련다. 내 정체성은 노무현을 사랑하고 문재인을 옹호하고 추미애를 어여삐 여기고 이재명을 지지한다.

이 나눔법이 탐탁치 않지만 굳이 나누자면 나는 진보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정치진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각자 살아 온 과정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니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런 다름인 거다. 하지만 나와 다른이가 나와 많이 '다름'이 아닌 조금은 '같음'으로 만들 요량으로, 나의 얕은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 글을 쓴다.

상식과 몰상식의 정치


나는 대한민국 정치인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기 보다는 상식 vs 몰상식 또는 공익 vs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정치인 뿐만 아니라 언론, 경제, 교육, 문화, 모든 사회 전반에 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단이 가능하고 누가 팥이고 누가 콩인지, 누가 새싹이고 누가 잡초인지 선택이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변화

 
지구촌 사회는 자본주의 발전 속에 민주주의도 같이 변화해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광복 후, 미군정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80%의 국민이 사회주의를 원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 당시 우리 국민이, 지금과는 달리 진보 좌파적이었다는 방증인데,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많이 보수 우파적이다. 국민의힘이 저렇게 지지율이 나오는 걸 보니 말이다.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는 민주주의가 뭔지도 몰랐을 거다. 조선 봉건 왕조를 거쳐 식민지배를 받다가 해방을 맞았으니 백성이 주인이라는 '민주'의 개념이 아예 없었고 경험도 전무했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그냥 미국이 힘이 쎈 거 같으니 미국의 정치체제를 어떨결에 받아들였던 거다. 그리고 뭐가 뭔지 잘 몰랐기 때문에 앨리트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승만의 권위 민주주의

 
그 권위에 대상이 바로 이승만이었는데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미 슈퍼스타였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이천삼백만의 생명의 소식이오,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학무도한 왜적의 절망 속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이승만 단파라디오

1942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는 가운데 이승만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가 단파라디오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이 방송은 미국 본토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이었다. 이 방송을 경성방송국 조선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청취했다. 

그리고 암암리에 입에서 입으로 궁지에 몰려가는 일본의 전쟁상황소식과 함께 이승만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얼마 후 총독부가 이를 눈치를 채고 경성 방송국 관계자를 포함한 300여명을 투옥시켰다. 이것이 바로 '단파방송밀청사건'이다. 바로 이 단파방송밀청사건으로 이승만은 조선의 민중에게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권위 민주주의의 독재로의 길

 
해방 후, 정치적 주도권을 먼저 잡았던 여운형과 그리고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를 제치고 이승만이 권력을 잡게 된 이유가 바로 저런 스토리로 대중들 인식 속에 권위가 더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권위 민주주의'는 권위에 아첨하며 기생하는 정치인을 양산하고 종내는 독재정치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승만독재- 박정희독재- 전두환독재를 겪게 된 것이다.

긴 세월 우리는 독재의 사슬을 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나? 독재자와 공모한 사법부가 저지른 죄악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죄없는 학생과 시민을 가두어 고문하고 죽였다.

독재가 길어지고 포악해질 수록 이런 사실을 알리는 언론기사는 점점 사라지고 빛이 사라진 암흑처럼 진실은 실종되고 증발됐다. 기사는 검열당해 삭제되고, 고쳐지고 언론사는 통폐합 당하고, 정의로운 기자는 옥에 가둬 패고, 고문하고, 의지와 기를 꺾어 산 송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독재자의 무도한 짓을 고발하고 알려야 할 언론은 겁을 먹었고 무릎 꿇어 오히려 그들의 주구가 되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렸던 것이다.

언론의 오염과 국민의 우민화

 
진실을 전하는 언론사나 기자는 온데 간데 없고 세상엔 온통 독재를 정당화하는 선전선동만 난무해졌다. 국민교육헌장이나 국기에 대한 경례, 대한늬우스...등등이 그 예다. 또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 의 3S 정책으로 국민의 눈을 돌려 불만을 잠재웠다. 한마디로 국민을 우민화해서 길들이려 했던 거다.

마침내 독재의 사슬을 깨고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 되찾은 민주주의 역시 우리가 바라고 걸어가려 했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단지 권위로 민주주의를 지배하던 독재정권에서 자본으로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재벌에게 권력이 넘어갔을 뿐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에 겁을 먹고 6.29선언을 한 노태우의 슬로건이 '보통사람 노태우' 인 것은 전두환의 후계자인 그가 권위를 어느 정도는 내려 놓겠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처럼 극악무도한 공포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거다. 아니, 세상이 바뀌어 할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러자 절대권력에 작은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고 "권력은 빈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란 유명한 말처럼 그 공백을 독재정권하에서 온갖 특혜를 받고 성장한 재벌의 오너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왕이다. 그리고 무한경쟁을 시킨다. 이 무한 경쟁을 방치하면 냉혹한 자본은 인간의 본성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개인주의를 심화시켜 마침내 민주주의 핵심인 연대의 고리를 깨트린다. 그렇게 연대가 깨지면 나만 잘 살면 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서 탐욕이 들끓는 아귀같은 세상을 만들어진다.

그리고 자본은 눈덩이 같다. 굴러갈 수록 점점 거대해진다. 돈이 돈을 벌고 놀음판 싹쓰리가 벌어진다. 결국엔  '좁쌀 만바퀴 돌아야 호박 한바퀴를 못 따라가는' 아주 고단한 사회가 되어버리는 거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실상은 자유없는 민주주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독재자가 가져던 권력이 가진 재산만큼 재벌 총수들에게  나누어 지고 우리의 자유는 그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실상은 자유 없는 민주주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독재자가 가졌던 권력은 가진 재산만큼 재벌 총수들에게 나누어지고, 우리의 자유는 그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로부터 자유입니까? 사람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와 속박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중에서도 지배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을 얘기할 때는 평등이 근본입니다." / 노무현

변호사는 전직대통령 이명박을 감옥에서 빼내 오지 못하지만, 재벌 총수 이재용은 빼내 온다. 이것만 봐도 이미 권력은 정치인에서 재벌 총수에게로 옮겨 갔다. 선출되는 정치인은 임기가 있지만, 상속되는 재벌 총수는 임기가 없는 종신직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럴 진데, 세상에 힘깨나 쓰는 기회주의자들이 누구의 줄을 잡을지는 뻔하고, 안 봐도 비디오인 거다.

재벌이 가장 손쉽게 빼앗아 온... 아니 주워 온 권력은 '언론 권력'이다. 삼성의 동양방송과 중앙일보 창간을 시작으로, 재벌 오너는 방송 언론사를 사들이거나 생살여탈권을 쥔 광고주의 막강한 힘으로 행정, 의회, 사법에 이어 제4부 권력이라 일컫는 언론 권력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고 있다.

IMF와 언론의 역할

 
IMF 환란을 떠올려 보라. 한국의 외환위기는 이미 97년 초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멕시코에 이어 한국은 지금 심각한 사회적 위기에 처해 있고, 이는 앞으로 닥칠 어려움도 예고하고 있다”며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도 마찬가지”라고 보도했다. 다른 많은 외신들도 한국의 경제 위기를 거론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르몽드지를 인용하며 "외국 언론에 비친 ‘노동계 파업"이라는 타이틀로 보도를 하였다. 정작 르몽드 기사에는 노동계 파업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조선일보는 국가 경제가 결딴날 처지에서도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리고 외신은 또다시 여러 차례 외환위기의 신호를 보냈지만, 그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였다. 오히려 조선일보는 97년 11월 1일 "DJ 집권하면 양심수 사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싣고 ‘양심수 논쟁’을 주도하며 대선 정국을 공안 분위기로 몰아갔다. 양심수 논란이 당시 이회창 여당 후보에게 매우 유리한 정쟁거리라는 점을 조선일보는 놓치지 않은 것이다. 경제 위기 극복보다 ‘대통령 만들기’와 '친재벌기업'이 우선이었던 거다.

이틀 후, 11월 3일 블룸버그 통신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긴급기사’로 전 세계에 타전했다. 정말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1997년 11월 21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 방침을 발표하기 직전까지도 “경제 펀더멘털은 괜찮다”는 정부 발표를 앵무새처럼 지껄이고만 있었다.

그리고 1997년 11월 21일, 임창렬 부총리가 IMF에 구제신청을 공식 발표한다. 그리고 우리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이후 또 한 번의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언론의 책임과 민주주의

 
그때 만약 언론이 재벌기업과 부정한 정치 무리들 편이 아니었더라면, 또 언론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더라면, 그리고 외신에 귀 기울여 막장의 카나리아처럼 시그널을 보냈더라면, IMF에게 그렇게 발가벗기는 무장해제까지는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중론이다.

민주주의는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해야 유지될 수 있는 체제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이자, 어쩌면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며, 그만큼 각자의 생각과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여론을 모으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이다.

그 민주주의에서 여론을 모으는 역할을 언론이 하는 건데,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기관이 공익이 아니라 재벌과 같은 어떤 특정한 부류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한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재벌 영주의 영향력에 놓인 또 하나의 봉건 사회일 뿐이다.

재벌과 언론의 결탁

 
오늘날 재벌그룹이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제는 재벌 오너들이 행정권력, 의회권력, 사법권력, 언론권력 모두를 흡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로써, 재벌 오너에게 복무하는 언론은 민주주의의 적이고 개혁의 대상이다. 국민을 성숙한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보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발목 잡고, 늘어지고, 딴지 걸어 분탕치고 분란만 일으킨다. 신문사설은 오피니언 리더의 고심의 흔적은 없고 개인의 일기장에나 써야 할 투정으로 가득 채운다. 사설이 아니라 배설이다.

외신도 인정하고 경이로워하는 K방역을 평가절하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업적은 무조건 패싱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것을 예단하고 확정하여 오보를 양산한다. 그러고도 사과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 증거를 여기에다 다 옮겨 붙일 수도 있으나 그러지 않겠다. 과거 기사를 역순으로 찾아보면 언론이 책임없이 막 내지른 기사를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언론 개혁의 필요성

 
언론은 사회의 공기라고 한다.
오염된 언론은 민주사회를 병들게 한다.
오염된 언론을 죽이고
새로운 언론을 살려야 민주주의가 산다.

노무현대통령의 언론에 관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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