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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친구야! 눈 내려 상념에 잠기는 밤이다


2013-12-20 



사랑하는 나의 친구 강ㅇ야!
눈 내리는 이 밤, 또 자판을 두드린다.

오늘도 공중파와 종편 TV는
제 발밑 풍기는 오물은 외면한 채

연일 북한 소식으로 극성스럽게 호들갑을 떨며, 

자칭 전문가들은 진단과 예측으로 설왕설래하고 있다.

우리의 언론은 왜? 저렇게 애써 오지랖을 벌릴까
비스켓 한 조각만큼의 팩트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무리수가
마치 차력사들의 차력쇼처럼 무지막지해 보이니 참으로 보기가 거북하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막바지에 접어든 2013년,
상념에 젖어 잠시 올 한해를 뒤돌아본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을 선택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공약실천은 비루해지고 그네를 민 향단이와 방자들의 논공행상만 요란했지. 또 정치가 실종하고 고집불통노처녀 히스테리가 방방곡곡에 메아리쳤어. 나는 그런 꼴을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에 낙담했고 무력감에 휩싸여 세상에 냉소를 끼얹기만 했지. 그리고 희망을 하얗게 태워 버렸어. 그래서 그런지 남은 게 어금니 하나더라. 엊그제, 빠진 어금니에 금쪽같은 거금 220만원을 보태 같이 갈아, 녹아내린 잇몸에 다시 채워 넣었다. 꽁꽁 얼어붙은 이 불경기에 말이야. 와이프 사랑에 눈물 찔끔 흘렸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너무 몰입한 것 같지?
주제넘게끔........
그리고 계란으로 바위치기 한 것 같지? -_-

하지만, 오늘날 이 세상은 우리를 속박하고 가로막는 바위에 끊임없이 계란을 던져가며 조금씩 변화해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밑바닥에 가라앉은 너덜해진 믿음을 다시 꺼내 보련다. 그리고 무릎 꿇는 굴종이 아닌, 한손 번쩍 치켜 올려 아닌 건 아니라고 나의 ‘이유 있는 반항’을 다시 시작해 보련다.

강ㅇ야!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게... 세상의 위대한 문명은 속박에서 자유로, 자유에서 번영으로, 번영에서 만족으로, 만족에서 무관심으로, 무관심에서 다시 속박으로 이런 과정을 되풀이 해왔다고 해. 참 허무하지? 그래서 과거를 애써 기억하지 않아 되풀이 되는 이 허무한 순환고리를 깨려면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작년 대선에서 경이적 투표율을 기록하고 압도적으로 새누리당을 선택해 나를 부끄럽게 한 50대 우리는, 불행하게도 식민사관으로 쓰인 역사책으로 인해 자학의 습성을 내안에 키웠고 유신독재사관으로 버물린 윤리책이 우리의 주관을 서서히 마비시켰던 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들어.

그리고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멸공통일」, 「총력안보」, 따위의 호전성구호에 내몰리고 휘둘리면서 반공전사로 훈육되었지.

또 「잘살아 보세」,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 「근면협동」, 「저축증강」, 「더 일하는 해」, 「증산수출」 따위의 수많은 개발독재 표어 아래,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피동태인간으로 길들여진 불쌍한 세대라고 난 생각해. 그래서 우리 50대는 찬찬히 숙고할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몰라.

강ㅇ야!
우리 모두는 6.25라는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다. 아주 안타까운 일이지. 그러나 보수우익을 자처하는 수구세력은 정권을 잡으려 이것을 악용하는 야비한 짓을 매번 서슴지 않아. 그것이 바로 “빨갱이 타령”이야. 이 타령은 아주 강력해서 잠자던 트라우마를 흔들어 깨우고 결국 우리는 공포심에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마비가 되지. 그래서 도전보다 안보를 택하게 돼. 하지만 그 선택은 우리아이의 미래를 겁박하는 전혀 어른스럽지 못한 짓이란 생각이 든다.

안보. 중요하지. 생명과 재산이 직결된 일이니까. 근데 너 그거 아니?
남, 북한 독재자들은 하나 같이 서로 안보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해왔다는 것을......

김일성과 박정희는 겉으론 서로 으르렁되는 라이벌이었지만 독재에 관한 동업자였다고 해. 김일성은 ‘미 제국주의 앞잡이 괴뢰도당 남조선’이 호시탐탐 북침을 노린다 하였고 박정희는 ‘북괴의 적화야욕’에 맞서 안보태세를 확립하자고 서로의 인민에게 똥 겁을 주었어. 그리고 뒤로는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이런 일도 있었어. CIA비밀문서에 의하면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전에 유신헌법제정 사실을 미리 김일성에게 알렸데. 김일성도 이에 맞춰 주체헌법을 제정했다는 거야. 심지어 발효일자도 같다고 해. 이것만 봐도 이들의 이념에 의한 안보논리는 한마디로 짜고 친 고스톱인 것 같지 않니?

이윽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화려한 금수강산은 두 독재자에 의해 수십 년 간 선전선동 구호로 뒤덮여 몸살을 앓았지. 그리고 남. 북한은 개인을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개인위에 국가가 군림하는 반시대적 전체주의국가를 공고히 해왔고.

그러나 남한은 맞서 싸워 다행히 그것을 엎었고 북한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불행하게도 동토의 국가로 지금 고립무원에 빠져있지. 그야말로 우리에겐 화약고 같은, 참으로 애증이 점철된, 그러나 특별한 운명과 피를 나누어 가진 형제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아. 통일. 언젠간 반드시 해야겠지. 물론 전쟁 없는 평화통일로 말야.

전체주의 창시자 무솔리니는 전체주의를 이렇게 기술했어.

"국가 안에 모두가 있고, 국가 밖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위키 백과는

“전체주의 국가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민족의식과 국가주의를 고취시키고 경찰 및 기타 기관을 동원한 공포정치로 법치주의와 인권을 말살하고 사회적 불만을 억누르며 특정계층, 출신지역을 선택적으로 차별하거나 외부의 적과 연루되어 있다는 비난을 조장하여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어때? 지금 한국 상황과 비스무리 하지? 이처럼 전체주의국가는 애국심을 강조를 해. 지난 역사에서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그랬고 독일의 나치와 일본의 제국주의가 그랬지. 그 결과 47,200,000만이란 어마어마한 사람이 죽었던 거지.

이것만 봐도 국가주의에 의한 애국심은 아주 위험할 수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난 정치인이나 우익단체가 평화 시에 틈만 나면 부추기는 애국심고취행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 애국심고취행위는 오로지 타국에 침략 받아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만 필요한 거지, 아무리 전쟁위험이 높아도 절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이는 국민의 감정을 격앙시켜 호전성을 이끌어내, 결코 벌어지지 않을 전쟁도 벌어지게 만들 확률이 아주 높아지기 때문이지.

우리가 전쟁을 겪지 않은 축복받은 세대라는 게. 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 그리고 이 축복을 내 아들에게도 온전히 물려주고 싶어. 그러려면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겠지.

손자병법 하면 떠올리는 것 중에 하나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인데 손자병법에는 ‘백전백승’이란 말이 없다고 한다. 대신 ‘백전백태’ 말이 있다고 해. 싸울 때 마다 이기는 법은 존재 할 수가 없다는 거지. 그리고 손자병법의 핵심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이라는 거야. 말하자면 ‘부전승’이 가장 좋다는 거지. 온전하게 이기는 것. 상대도 온전하고 나도 온전하게 목적을 달성하라는 손자의 이 지혜가 남과 북 인민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양쪽의 부덕한 정치인에게 지금 가장 요구되는 덕목인 것 같구나.

강ㅇ야!

어저께 손석희 <JTBC 9시 뉴스>에서 민주당 김광진 의원의 "국방부 조사본부가 옥도경 사이버사령관 컴퓨터에서 청와대 보고 문건을 다수 찾아냈다는 제보를 입수했다"라는 뉴스가 보도 되자마자, 어제 국방부가 "사이버사 심리전단장이 댓글 지시 … 대선 개입은 아니다" 그리고 "대선개입 의도 없었고 개인의 과도한 지시"였을 뿐이라는 이 중간수사발표를 어떻게 생각을 하니?

저 놈의 “개인의 일탈“, “개인의 일탈“, “개인의 일탈“........

저렇게 쉽게 빠져 나가는 방법을 왜 우리는 몰랐을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이 무모한 짓을 아주 태연스럽게 너무 대놓고 하는 저들을 어쩌면 좋을까?

뭐, 경쟁에 쫓겨 먹고 살길이 바쁜 우리가 또 그러려니 하니까 그러겠지......
그렇지만, 이런 우리의 무관심이 저들의 배포를 키웠을 거라는 것에 난 정말 화가 난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강ㅇ야!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애써 외면하려 지금 무관심으로 돌아서는 중인 것은 아닌지..... 우리의 아들은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어 <안녕들 하십니까?>란 대자보로 양심의 목소리를 이어 가는데, 정작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아비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 볼일을 보셨으면 화장실변기 물은 내리셔야지요!!” 라고 핀잔을 주는 것 같단 말이다.

응답하라 50대.....
지 지 지 직----
응답 없음.
50대는 지금 무관심 중......

그리고 우리는 다시 속박의 시대로 접어들어 굴종을 강요당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을 한다.
엊그제 신문기사만 보아도 그렇구나.

청와대는 18일 대선 1주년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데 대해☞ "원칙대로 하는 데 대해 손가락질하고 불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랑스런 불통"이라고 반박했다.

원칙이란 “많은 경우에 두루 적용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 이라는데
이것은 나 혼자 정하는 게 아니지.
저러니 ‘말이 안통하네뜨‘ 란 별명이 생겼지.
그리고 바로 저런 게 독재마인드라는 것이야.

여기서 우리, 서울대 허성도 교수의 강의 내용을 보자.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세습되는 강력한 왕 세종의 정치철학과 천부인권설 민주주의에서 국민주권을 잠시 5년간 대의 받은 대통령 박근혜의 정치철학을 비교해 보자구나.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내용은 밑에 파일로 첨부할 테니 시간나면 읽어봐라. 우리가 배웠던 일제식민사관의 ‘이씨조선‘이 우리를 얼마나 스스로 자학하게 하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야.

사랑하는 나의 친구 강ㅇ야!

박근혜대통령이 늘 강조하고 입에 달고 다니던 민생 말이다. 그 민생이 정말 진정성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를 '잘살아 보세','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며 채찍질 하던 아버지 박정희대통령의 유업을 받들었다면, 우리는 박근혜 정부에게 이것을 물어야 한다.

우리는 위대하신 영도자 박정희대통령의 재벌성장계획에 따라
기꺼이 재벌의 머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을 OECD 국가 중 근로시간 랭킹 항상 상위에 오르는 바와 같이
변변한 휴식 없이 낮과 밤을 죽도록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들은 IMF를 불러 오더군요.
그리고 불려준 재산을 홀라당 말아 먹었습니다.
불법적인 분식회계를 통한 무분별한 차입이 원인이었지 우리의 잘못은 없었습니다.
굳이 우리의 잘못을 찾는다면 순응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장롱을 뒤져서
결혼반지며 아이들 돌 반지 등을 팔아 저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또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저들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마치, 없는 집 장남 소 팔아 공부시키려는
못 배워 가슴앓이 하는 아버지의 희망을 헤아리는 차남과
재봉틀 돌려 학비 보태는 여동생의 갸륵한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만들었다는 노동법이 있었지만 
여전히 노동시간은 많았고 환경도 열악했습니다.
그러나 자식 공부시키는 재미로 참았습니다.

그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일벌레란 냉소를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재벌과 친한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님이 약속하셨던
파이가 커지면 각자 나누어가질 것이란 희망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엊그제.
신문기사를 보니 1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이 183조원이라는군요.
사상 최대치랍니다.

야속합니다.
일자리를 못 찾은 우리 아이들은 이 추운 거리를 헤매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저 많은 돈을 쌓아두고 투자도 않습니다.

묻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의사진단서를 받으러갈 때
우리는 현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병역의무를 충성스럽게 마쳤습니다.
또, 당신의 자식들이 비행기 표 끊을 때
우리는 남아서 자식도 기꺼이 내 주었습니다.

박근혜대통령님!
우리가 무엇을 잘못한건가요? 네?
  
잘못이 없다면....
왜? 전 세계 206개국 중 15번째로 부국이라는 조국 하늘아래에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가기에 힘이 드는 사람이 많은 겁니까?

이렇게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강ㅇ야!
독립군이, 빨갱이로, 민주투사로, 용공분자로, 국가유공자로, 생활보호대상자로 변해온 반면에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파는 지금까지 오로지 반공 하나만을 내세우며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호의호식 해왔다는 것은
참으로 이 나라는 부정한 현대사를 지나왔음을 증명하는 것이야.
이 부정한 현대사를 통렬하게 반성해야 만이
제대로 된 발걸음이 시작될 것이라 생각하며 이 상념을 마치련다.
남은 한해 잘 마무리하고 새해엔 더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 일구길 빈다.

 

 허성도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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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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