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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에서 막힌 건 길이 아니라 민주주의다



농민들의 평화로운 시위가 남태령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막히고 있다. 추운 겨울밤, 농민들과 시민들이 공권력의 벽 앞에서 대치 중인 상황은 그 자체로 비상식적이다. 그러나 이 사태를 단순히 시위와 공권력의 대립으로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바로 남태령이라는 장소의 상징성과 김건희의 주술적 사고가 교묘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다.


남태령, 단순한 길목인가?

남태령은 조선시대부터 서울과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관문이었다. 역사적으로도, 풍수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로 꼽힌다. 특히 관악산과 남태령은 서울로 들어오는 기운의 통로로 여겨져 왔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기운을 막기 위해 숭례문 앞에 연못을 파고 경복궁을 정남향이 아닌 약간 비껴서 짓는 등 철저히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설계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태령을 단순히 물리적 경로로만 볼 수 없다. 농민들이 트랙터를 타고 서울로 진입하려는 것을 막는 데 남태령이라는 지점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김건희와 주술 통치의 그림자

김건희는 이미 여러 차례 주술적 사고와 관련된 논란에 휘말린 바 있다. 용산 집무실 이전이나 청와대 복귀 거부, 특정 종교 행사 참석 등은 국정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판단 대신 미신과 주술로 해석하려는 그녀의 세계관을 드러낸 사례들이다. 이번 남태령에서 벌어진 사건 역시 그녀의 주술적 통치 스타일과 일관된 맥락으로 보인다.

남태령은 서울의 남쪽 관문이며, 농민들이 들고 올라오는 깃발, 트랙터, 쌀 등은 상징적으로 "기운"을 나타낼 수 있는 물건들이다. 김건희가 이러한 요소를 서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재앙적 기운"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경찰의 대응은 법적 절차와 합리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이들을 물리적으로 막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공권력 남용인가, 주술적 액막이인가?

경찰은 트랙터의 유리를 파손하고 농민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했으며, 시민들을 연행하면서도 명확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미란다 원칙 고지는커녕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식의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는 단순히 집회와 시위를 관리하기 위한 공권력의 정상적인 집행이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이 김건희와 윗선에서 농민들의 시위 자체를 "부정적 기운"으로 간주하고 이를 차단하려는 주술적 액막이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남태령이라는 지리적 상징성과 경찰의 비상식적 대응 방식은 이를 뒷받침한다.


국민을 "부정적 기운"으로 보는 정권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식량 안보를 위해 양곡법을 지지하며 거리로 나왔다. 그들의 목소리는 국민 모두의 목소리다. 그런데 이 정권은 국민의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그것을 "서울에 들어오면 안 될 기운"으로 치부하며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이것은 국민을 "부정적 기운"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사고방식이다. 주술적 사고와 공권력의 결합은 단순한 미신적 통치의 문제를 넘어,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남태령에서 벌어진 공권력 남용은 단순히 경찰 간부의 독단적 결정이 아니라, 정권의 전반적인 세계관과 지배 철학이 드러난 사건이다.


미신 통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김건희의 주술적 사고가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혹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문제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정책을 기반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건희와 윤석열 정권은 국민의 목소리를 막기 위해 주술적 사고를 동원하고, 공권력을 남용하며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


남태령의 벽을 넘을 때

남태령에서 막힌 것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와 목소리다. 주술적 사고에 기반한 통치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는 이 벽을 넘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화합된 의지와 명확한 목표다. 남태령의 벽을 넘어, 권력을 견제하고 국민의 권리를 회복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