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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괴물을 만들어내는 교육 시스템(feat: 이완배기자, 김누리교수)

서부지법 폭동

최근 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벌어진 극우 지지자들의 난동 사건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엘리트주의와 그로 인한 폐해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난동에 가담한 이들 중에는 소위 명문대 출신, 고학력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씁쓸함을 넘어 섬뜩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왜 우리는 ‘서울대 증권맨 난동’이라는 기사에 그토록 분노하는가. 왜 명문대 출신이라는 배경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부당한 특권 의식을 연상시키는가. 이는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일까.

이완배기자와 김누리교수의 문제 제기는 우리에게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 하나는 국립 서울대의 해체를 주장하며 한국 사회의 엘리트주의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분석한다. 다른 하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허약성을 지적하며,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이 파시스트적 사고방식을 내면화한 ‘심연 없는’ 인간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두 관점을 통섭해서 한국 사회가 어떻게 엘리트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해보려 한다.

공공의식의 부재, ‘명박’ 양성소로서의 엘리트 교육

이완배기자는 행동경제학 실험을 통해 엘리트 집단의 이기적인 성향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공공재 게임에서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생들의 기부율은 다른 집단에 비해 현저히 낮았으며, 이는 고학력자, 특히 경제학 전공자들이 공공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고백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

이완배기자는 그 원인을 어릴 때부터 ‘서울대’라는 터널에 갇혀 경쟁에 매몰되는 교육 환경에서 찾는다. 오로지 명문대 입학이라는 획일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고의 폭이 좁아지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과 사회적 책임감을 키울 기회를 잃게 된다. 이는 마치 일본 정신의학자 오카다 다카시가 지적한 ‘심리 조작’과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터널 속에서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아이들은 바깥 세상의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또 다른 터널, 즉 특권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엘리트 집단에 안주하게 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엘리트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너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서울대 가서 꼭 좋은 직장 얻어서 꼭 니가 잘 먹고 잘 살아야 돼”라는 노골적인 성공 지향적 메시지는 아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기여나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이기적인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서울대 입학을 개인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공공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결여한 ‘명박’형 인간을 양산하는 토양이 된다.

특권 의식의 고착화

최후통첩 게임 실험은 엘리트주의가 개인의 심리에 미치는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3 더하기 5 퀴즈처럼 사소한 우위를 점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훨씬 더 이기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사실은 인간의 오만함과 특권 의식이 얼마나 쉽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서울대 입학은 단순히 공부를 잘했다는 증명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승자’의 지위를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위는 서울대 출신들에게 특권 의식을 심어주고, 사회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태도를 강화한다.

이완배기자는 서울대 출신들이 누리는 압도적인 사회적 지위가 정당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운 좋은 환경과 사교육의 덕분이라고 지적한다. “그냥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됩니다. 뭐 이런 사교육 좀 받고 그냥 터널에 좀 오래 갇혀서 그냥 엉덩이 좀 오래 붙이고 있었던 겁니다.”라는 냉소적인 평가는 서울대 입학이라는 결과 뒤에 감춰진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드러낸다. 이러한 불평등은 서울대 출신들에게 과도한 특권 의식을 부여하고, 사회 구성원 간의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파시스트의 탄생

독일문학을 가르치는 김누리교수는 한국 교육 시스템이 민주주의자를 양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그 내면은 여전히 파시즘의 잔재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4.19, 5.18,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빛나는 성취인 동시에 끊임없이 군홧발에 짓밟힌 좌절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는 발전했지만, 민주주의적 가치관과 시민 의식을 내면화한 ‘민주주의자’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김교수는 한국 교실에서 12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 성숙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파시스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그는 파시즘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강자와의 동일시, 약자 혐오, 동조 강박, 폭력성과 공격성, 흑백 논리를 제시하며, 이러한 특징들이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경쟁을 맹목적으로 강조하는 교육 시스템은 아이들에게 우열을 가리고, 승자 독식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공감 능력을 키우는 대신, 획일적인 사고방식과 배타적인 태도를 조장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 교육이 아이들의 ‘심연’을 빼앗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는 아이들이 문제집 풀이에만 매몰되어 깊이 있는 사유와 자기 성찰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심연 나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우물이 있어야 그 속에서 자아가 자라고 정체성이 자라고 그 속에서 나라고 하는 인식이 자랄 거 아니에요. 이게 메말라요. 너무 표피적이에요. 자기 심연이 없는 표피적 인간이야말로 그런 선동가들의 먹잇감이 되기 쉬운 거죠.”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관과 가치관 없이 맹목적으로 대세를 따르는 ‘심연 없는’ 인간은 쉽게 선동되고, 파시즘적 사고방식에 물들기 쉽다.

교육 시스템의 근본적인 혁신

결론적으로 한국 사회는 엘리트주의와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의 결합으로 ‘공공의식 없는’ 이기적인 엘리트와 ‘심연 없는’ 파시스트를 동시에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엘리트 괴물들은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위협 요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엘리트주의를 해체하고, 교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첫째, 국립 서울대를 포함한 명문대에 대한 과도한 특권 부여를 중단하고, 대학 서열화를 해소해야 한다. 서울대 해체론은 단순히 특정 대학을 없애는 것을 넘어, 엘리트주의의 상징을 제거하고, 교육 기회의 균등을 실현하려는 시도이다. 지방 국공립대학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둘째, 경쟁 일변도의 교육 시스템을 혁신하고, 민주시민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독일의 교육개혁 사례처럼 경쟁 교육의 폐해를 인식하고, 협력과 공존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깊이 있는 사유와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저항하는 능력, 분노하는 능력,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양성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투자이다.

셋째, 사회 전반의 가치관을 변화시켜야 한다. 개인의 성공보다 사회적 책임감을 강조하고,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엘리트주의와 특권 의식을 비판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벌어진 난동 사건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엘리트 괴물의 탄생을 막고,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시스템과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혁신이 필요하다. 더 이상 ‘서울대 증권맨 난동’이라는 뉴스를 보며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엘리트 괴물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일부는 아닌지 자성해야 한다.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학을 보게 하라"는 낡은 슬로건 대신, "누군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심연 있는’ 민주주의자를 보게 하라"라고 외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