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chosun.com/opinion/editorial/2024/10/01/IZGNWOCLEZBI5DGJPRIQRRCYEU/
조선일보의 사설은 마치 원자력 발전이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AI 혁명, 탄소 중립, 전력 수요 증가 등을 내세워 원전 없이는 미래가 없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 논리는 경제와 환경 양쪽에서 너무나 얄팍하며, 깊이 있는 비판이 절실하다.
원전이 유일한 대안? 과장도 유분수다
먼저 이 사설이 주장하는 바는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물론,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원전이 "훌륭한 에너지원"이라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 원전이 무조건적 해답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원자력 발전이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하다고? 아, 정말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 스리마일 섬, 체르노빌, 후쿠시마 사고를 겪고도 원전이 '안전하다'고 단언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환경전문가는 수없이 경고해 왔다.
원전의 안전성 문제는 단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인 위험이다. 기술적으로 아무리 안전성을 보장한다 해도, 자연재해나 인간의 실수는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마치 설계 연한을 넘어 원전을 돌려도 괜찮다는 듯한 말은 무책임하다. 원전을 중단하거나 철저히 관리하지 않으면 그 피해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크다. 더군다나 그 피해는 현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감당해야 한다. 이 무책임한 태도가 과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원전 경제성의 허구
경제적 측면에서도 원전은 만능이 아니다. 원전 건설과 운영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며, 사고 발생 시 치러야 할 사회적, 경제적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일본이 치른 비용이 얼마인지 아는가? 그 누구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막대하다. 하지만 이러한 비용은 사설에서 묵과되고 있다. 왜?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탈원전 정책이 "자해 정책"이라니. 웃음이 나오는 표현이다. 한국이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 것은 단지 경제적 이유가 아니다. 원전이 가지는 잠재적 위험을 감안하고, 장기적인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한 정책적 노력이었다. 다른 선진국들이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탈원전이 자해라기보다는 '현명한 자각'에 가깝다. 경제적 효율성만을 좇아 환경 파괴와 위험을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해다.
재생에너지, 제대로 된 대안
원전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에너지 패러다임의 전환을 방해한다. 재생에너지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전력 저장 기술과 스마트 그리드 등으로 기존의 한계를 극복할 방법도 충분하다. 이미 많은 국가들이 원전을 포기하고도 성공적인 에너지 전환을 이뤄가고 있는데, 왜 한국만 과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재생에너지 발전소는 지구의 자연 자원을 훼손하지 않으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AI 혁명과 탄소 중립을 이야기하면서 원전만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발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 가깝다.
결국, 이 사설은 경제와 환경, 두 가지 관점에서 모두 허술한 주장을 펼친다. 원전은 결코 만능의 에너지원이 아니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재생에너지가 진정한 해답이다. 위험을 간과한 발전은 발전이 아니다. 삐걱거리는 원전 정책이 우리에게 가져올 미래는 밝지 않다. 발전소 대신, 태양과 바람이 우리 미래를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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