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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짐 푸는 중

이승만은 도망자였을 뿐이다.

2014-02-07 

이승만 시리즈 3편

 

북진통일


이승만은 6.25가 일어나기 전부터 시도 때도 없이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다. 그럼 자신만만하게 북진을 공언할 만큼 국방력 강화를 사전에 철저하게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준비나 대비 같은 거 없이 허세만 부렸다.

 

전사 연구가들의 말에 의하면 대비만 제대로 했더라면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거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산악과 하천이 많아서 방어하기가 좋은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비를 잘해 놓고 개전 초기를 잘 막아냈으면 민간인 희생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어쨌든 개전 초기에 이승만 정부는 우왕좌왕하다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럼 이승만이 1950년 6월 25일 전에 어떤 지도력을 발휘했는지 한번 살펴보자.

전쟁 전, 이승만은 영국 상선 선장이었던 신성모를 국방장관에 앉혔다. 이해가 안 가는 인선이었다. 신성모는 이승만이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할 때 국회에 나와 “5,000톤 배 하나만 주면 공산당을 다 치고 바다를 다 치겠다”는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허세를 부렸다. 

 신성모가 국방장관이 된 과정이 참으로 어이가 없고 우습다. 이승만이 뭔가를 물으면 신성모는 눈물부터 먼저 흘렸다고 한다. 존엄한 이승만이 하문하니 감읍한다는 액션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 이승만은 참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성모는 장관이 될 수가 있었고 ‘낙루(落淚)장관’이란 별명까지 얻어 그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세간에 오르내리게 하였다. 그는 아마 배우를 했어도 틀림없이 불세출의 스타가 됐을 것이다.

그 당시 ‘지당(至當)장관’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방귀를 뀌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하는 장관 말이다. 이처럼 이승만은 아첨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알랑방귀란 ‘고사성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니 말이다. 그러니 주위에 아첨꾼만 꼬이고 떠받들려 져 독불장군 노인네가 된 모양이다.

그리고 총참모총장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지만 야전군을 맡아본 적도 없고 후방 일을 해서 작전 자체를 아예 잘 모르던 채병덕이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과 김구암살에도 연루되어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채병덕은 몇 달 후 '북어 사건'으로 해임이 되고 만다. 그 당시 38선에선 남북 간 물물 교환이 많았었는데 그걸 장교들이 얻어 쓰기도 하고 군에서 필요한 비용으로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북어 사건이 터져 채병덕이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승만은 전쟁나기 두 달 전에 다시 채병덕을 총참모총장으로 재임명하였다. 기준도 원칙도 없는 그야말로 임금님 맘이었다. 그리고 전쟁직전에 주요 사단장을 교체하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장병의 3분의 1이 휴가상태였으며 장교들은 그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에서 술에 흥청망청 녹초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과 그의 충성스러운 일본군 출신 장군들 그리고 아첨꾼 장관들은 저런 웃기지도 않은 꼬락서니로 북진 통일을 한다며 김일성을 자극해댄 것이다. 그러다가 어리바리하게 김일성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북의 남침

6월 25일 전쟁이 나자 이승만의 지도력은 더 가관이 아니었다. 전쟁이 나면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해 상황을 보고받고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데 대책다운 대책을 논의하거나 세운 게 하나도 없다고 한다. 국무회의를 열긴 열었는데 얼마나 성의가 없었으면 학자들은 그걸 간담회라고 한단다. 간담회... 간담회... 간담회... 끙.

참 어이가 없다. 지금 전쟁이 나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절단이 날 판인데 고작 간담회 수준의 대책 회의를 여는 지도자였다. 새누리당이 추앙해마지않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그리고 이승만은 국민의 안위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먼저 챙겼다. 전쟁발발 하루도 안지나 25일 밤에 피신을 해야 한다면 안절부절못햇다고 한다. 그날 밤에 무쵸 미 대사가 오자 “내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지 아느냐 내가 없으면 이 나라가 큰일 난다”라며 막무가내로 피신하겠다고 했단다.

오죽했으면 무쵸대사가 “당신이 피신하면 군은 붕괴한다. 모든 방어 능력을 상실한다. 당신이 지켜야 한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주겠다” 며 어린아이 달래듯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은 이승만이 피신하지 않고 서울을 용감무쌍하게 덜덜 지켜냈다.

이승만이 덜덜 보초 서던 하룻밤이 지나고 26일 날이 밝았다. 이제 지도자라면 정신을 차리고 대책을 세우면서 국민에게 전황 같은 것을 알려주는 방송을 해야 하는데 이승만은 안했다. 그의 호프 신성모와 채병덕이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헛소리만 해댔다.

6월 26일 밤에 열린 심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은 수도 사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수원천도 결정을 내렸다. 따로국밥이었다. 대통령인 이승만은 어떡했는지 아시나? 놀라지 마시라. 저런 상황에서 6월 27일 새벽 2~3시경 서울역으로 가 대기시켜둔 비상 열차로 도망을 쳤다. 물론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말 안 하고 혼자 도망을 친 것이다. 비서진한테만 얘기해서 열차를 끌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다시 대전으로 올라가 그 유명한 방송녹음을 하였다.

거짓방송


6월 27일 오후 7시경 이승만이 머물던 충남지사 관저로 무초 대사가 찾아왔다. 무쵸 대사는 이승만에게 미국이 곧 파병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3일 동안 겁에 질려 자기 신변 보호에 급급해 국민을 챙기지도 않았던 이승만은 그제야 안심되었던지 대 국민방송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의 방송은 전쟁 초기의 혼란상을 극대화해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을 빚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KBS 대전방송국 유병은 방송과장을 호출했다. 그리고 이철원 공보처장에게 방송 원고를 구술할 테니 받아 적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 원고를 전화기에 대고 녹음해 6월 27일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생방송인 것처럼 여러 차례 내보냈다. 국민은 이승만이 중앙청 또는 경무대에서 방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방송이 나가기 전의 상황은 “우리 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다. 아니 이미 38선을 넘어 해주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거짓방송을 해댔었다. 그러나 북한군 전투기가 서울 상공을 날아다니고, 대포 소리가 의정부 쪽에서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기에 서울시민의 불안은 커져만 갔었다.

이런 와중에 "동포 여러분 의정부를 탈환했다. 계속 진격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목소리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런 방송을 듣고 안심했던 국민은 낭패를 봤다. 불과 4시간 후면 인민군이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는 상황이었는데도 '서울 사수 방송' 을 함으로서 시민들이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빼앗았다.

이승만의 거짓방송이 울려댈 때 이미 미아리 근처에선 대포 소리가 쿵쾅거리고 있었다. 인민군이 거기까지 내려온 거였다. 오죽하면 '이 방송, 이대로 안 된다'고 해서 27일 자정쯤 방송국에서 꺼버렸다고 한다. 전쟁이 나고 처음으로 나간 대통령의 방송이 그랬다 하니 무책임해도 너무나 무책임한 이승만이었다. 

아비가 자식을 버려도 천륜이라 어쩔 수 없이 아버지라 한다지만 국민을 버리고 저만 살자고 줄행랑친 천륜도 아닌 대통령을 국부의 반열에 세우려는 저 새누리당의 작태를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도망자

그 다음 날 시민들이 눈을 떠 보니 서울은 온통 인민군 소굴의 아수라장으로 변해있었다. 방송이 못 미더워 새벽에 피난을 떠나던 시민 중엔 이승만 방송 후 4시간 반 만에 국군이 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800여 명이 몰살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리가 끊겨 피난을 못 간 탓에 인민군에 의해 죽거나 인민군이 후퇴할 때 납북되어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승만은 7월 1일 대전을 떠나 또다시 도망을 쳤다. 대전이 함락된 것은 7월 20일 이었는데도 참 빨라도 저렇게 동작이 빠를 수가 없었다. 대구로 가면 게릴라가 있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호남선을 이용해 목포로 갔다가 목포에서 다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전쟁 내내 도망만 다닌 저런 작자를 우리 착한 국민은 3번이나 대통령을 시켜줬으니 이승만은 그야말로 간뎅이가 부을 대로 부어서 희대의 3.15부정선거를 저질렀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차우세스쿠는 분노한 민중에 의해 끌어내려 져 기관총 세례를 받고 죽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분노한 민중에 의해 끌어내려 져 겨우 해외로 추방되는 은혜를 입었다. 참 우리나라 사람 너무 착하다. 착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근데 문제는 계속 착하다. 계속 계속 또 계속 용서해준다. 그래서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거 병 아닌가? 하고.......

맞다. 병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지역주의 투표 병’ 이거 고쳐야 한다. 안 그러면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들이 공천에 목을 매고 공천권에 영향력을 가진 원로정치인들에게 줄만 선다. 이런 고약한 폐단이 전통이 되고 관습으로 굳어지게 되면 정치가 대물림되는 원로원 정치사회가 될 수가 있다. 국가 안에 국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는 강자 우선이 되고 지금보다 더 심각한 정경유착과 정언유착이 이루어질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면 강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 정글의 법칙이 사회를 지배할 것이고 패배주의와 무망론이 만연해져 사람들은 저들이 선심 쓰듯 던져주는 조그만 보상에도 만족하는 ‘길들여진 안정’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의 삶과 진배없다.

참고한 것/서중석의 한국현대사

[이승만 연재 1편과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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