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국제 정세, '우크라이나 사태'는 갈수록 예측 불허의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선뜻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연한 동정심, 푸틴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 여기에 더해 윤석열의 어설픈 '지원' 소동까지. 이 모든 불협화음이 뒤섞여 증폭되는 혼란은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인지도 모른다.
사태는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최근 있었던 트럼프-젤렌스키 정상회담은, 세계를 경악케 한 설전으로 막을 내렸다. 존중으로 시작했던 회담은, 결국 날선 비난과 조롱만이 난무하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무례하다'며 질타했고, 젤렌스키는 '정의로운 평화' 운운하는 공허한 메시지만을 SNS에 남겼다. 러시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젤렌스키를 향해 맹렬한 조롱과 비난을 퍼부었다. 외무부 대변인 자하로바는 '젤렌스키의 거짓말'을 비꼬았고, 메드베데프는 그를 '오만한 돼지'에 비유하며 백악관에서 따귀를 맞았다고 조롱했다. 심지어 코사체프는 '다음엔 무릎 꿇고 기어야 할 것'이라며 노골적인 경멸감을 드러냈다.
이처럼 추악한 설전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건, 우크라이나의 입지가 더욱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이다. 서방 세계의 지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 징후일까? 아니면, 젤렌스키의 외교적 역량 부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참사일까? 어찌 됐든, 이번 회담 결렬은 닥친 현실적 난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들의 '결사항전'은 과연 헛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인가.

우크라이나의 내부적 위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심각한 내부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경제는 파탄 직전이며, 수백만 명의 국민이 타국으로 떠나 인구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전쟁 피로감이 국민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현상이다. 처음에는 애국심과 결의로 들끓던 국민 정서가 이제는 지친 표정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젤렌스키 정부의 지지율도 전쟁 초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락했다. 병력 동원 과정에서의 혼란과 부패 문제, 전선에서의 지속적인 인명 손실은 국민들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젤렌스키의 '불퇴전'을 외치는 목소리가 국내적으로도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제기된다.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냉철하게 자문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과연 단순한 '침략'이라는 단어로 규정될 수 있는 문제인가?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이분법적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할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이 사태를 20세기 유산, 낡은 소련 족쇄가 드리운 '내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다. UN의 시각도 그런 것 같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단순히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넘어선,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가족사'의 굴레에 갇혀 있다. 소련이라는 공동의 역사적 트라우마는, 그들의 관계를 질곡처럼 얽어매고 있다.
러시아의 과도한 불안감과 집착은 물론 비난받아 마땅하다. 허나,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침략 야욕'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나토의 동진(東進), 특히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는, 러시아에게는 사느냐 죽느냐의 절체절명의 문제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는 '칼날'을 코앞까지 들이대는 행위로 받아들였을 법하다. 푸틴 정권의 폭력성은 용납할 수 없지만, 그들이 느끼는 '절박함'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 또한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최근 러시아 주요 인사들의 젤렌스키 조롱 발언은, 오히려 그들의 조급함과 불안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여유 있는 자는, 굳이 상대를 비웃거나 깎아내리려 애쓰지 않는다.

유럽 국가들의 입장 차이
서방 국가들의 행태는 더욱 실망스럽다. 그들은 여전히 '정의'와 '인도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특히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도 점차 균열이 드러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 지원 노선과는 미묘한 거리를 두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높은 의존도, 지리적 근접성, 러시아와의 오랜 경제적 유대 관계 등이 그들의 입장에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의 마크롱은 여러 차례 푸틴과의 대화 채널을 유지하려 노력해왔고, 독일은 군사 지원에 있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폴란드, 발트 3국과 같은 동유럽 국가들이 적극적인 지원 입장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서방의 결속'이라는 표면적 구호 아래 잠복해 있는 균열의 조짐을 보여준다.
트럼프의 노골적인 '무례' 비난은, 미국 역시 우크라이나를 그저 자국의 '장기판 말' 정도로 취급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우크라이나의 운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자국의 득실만 계산하는 냉혹한 국제 질서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는 듯하다. 협상과 대화는 뒷전으로 밀려난 채, 오직 소모적인 전쟁만이 지속되는 현실은, 국제 사회의 무능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젤렌스키는 '정의로운 평화'를 갈망한다고 외치지만, 그의 외침은 과연 누구에게 닿을 수 있을까. 트럼프와의 설전, 러시아의 조롱… 이 모든 상황은, 그의 외로운 외침이 공허하게 흩어질 가능성만을 암시하는 듯하다.

중국의 역할과 영향력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에 일조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서방의 경제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함으로써,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을 간접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이 사태를 통해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균열을 가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전략적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의 '평화 중재자' 행세는 실질적인 해결책 제시보다는,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암시하는 신호로 읽힐 수 있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심각한 안보적 함의를 던진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동조나 진영논리에 갇힌 흑백논리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한 역사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낡은 족쇄에 얽매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탐욕과 셈법. 이 모든 요소들이 혼합된, 거대한 '망령극'의 비극적 결말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여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한반도에 대한 시사점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반도에 주는 교훈은 무겁고도 분명하다. 강대국 사이에 낀 분단국가로서, 우리의 지정학적 현실은 우크라이나와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역사적 일체성'을 강조하는 논리는,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는 수사와 닮아있다. 또한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경도될 경우 직면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고장이기도 하다.
윤 정부의 철없는 '미국 추종' 외교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국제 정세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없이, 미국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외교 행태는, 국가적 위신을 실추시키는 것은 물론, 실질적인 국익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냉대, 러시아의 조롱… 어쩌면, 우리의 어설픈 외교 역시 국제 사회의 냉소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씁쓸한 자화상이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외교적 자율성'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만의 독자적인 생존 전략과 외교적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크라이나와 같은 비극이 언제든 한반도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더욱 복잡하고 중층적인 외교 전략, 다자간 협력 체제 구축, 그리고 무엇보다 자주국방 능력 강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는 이제 냉철한 지성과 균형 잡힌 시각으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손쉬운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적인 비난이나 편향된 시각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복잡하게 얽힌 역사의 매듭을 풀고, 새로운 공존과 협력의 질서를 모색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비극은, 언제든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민족에게는, 결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혹독한 역사적 시험대에 서 있으며, 현명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더욱 암울한 수렁에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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